경전/나의 수행일지

기억의 통증

敎當 2022. 5. 22. 16:00

돌이켜 보면 참 세월 빨리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82년에 군대를 갔는데 부산 야전공병대로 자대배치를 받고 그 이듬 해 경북 울진으로 도로공사 파견을 나갔다.

지금의 왕피천계곡(불영계곡)의 도로공사를 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난공사였다.

그런만큼 사건 사고도 많아서 많은 젊은 군인이 죽었는데 거기에는 내 군대 동기도 포함되어 있다.

 

1983년 추석, 그날따라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불영계곡 물을 식수로 쓰고 있었는데 취사장에서 식수공급 협조연락이 왔고 내 친한 동기가 자진해서 운전지원을 했다. 

그때 나는 행정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그 동기가 나한테 뜬금없이(?) 같이 물뜨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

운전은 자기가 하니까 난 조수석에 앉아 있으면 된다는 얘기인데 난 할일이 있어서 함께가질 못했고

다른 동기가 같이 동승을 했는데 취사병 고참 1명과 이병 신참까지 총 4명이 같이 가게되었다.

불어난 물로 인해서 불영계곡 물은 흙탕물로 변해 폭포수 물을 받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항상 가던 곳이 아닌 다른 폭포수로 향했다는데 곡선길에서 흙이 무너지면서

결국 낭떠러지로 추락해 동기는 즉사를 하고 다른 동기는 왼쪽 팔과 갈비뼈 다리까지 으스러지는 부상을 당했고

취사병 고참은 뇌를 이등병은 허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 후 나는 특공부대 착출이 되어 전출을 가는 바람에 전혀 다른 부대에서 전역을 했다.

그렇게 제대를 하고 한참 후에 나는불영계곡에 가게되었는데 부대 막사자리에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었고

거기에 내 동기의 이름도 새겨져있었다.

 

사실 부산 야전공병대 군생활은 82년 11월에 자대배치되어 다음 해 4~5월쯤에 울진으로 파견을 갔다가

9월인가 특공부대로 차출되어 부산을 떠났으니 그리 오랜시간 추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은 군대시절 이야기를 엄청하는데 나 또한 파란만장한 군생활을 했다.

논산훈련소입소-대구이수교-부산야전공병대-김해공군부대파견-울진 불영계곡 공사파견-안동 특공연대-대전 차보대-대전32사단-조치원 연대-마지막 천안의 대대까지.....병무수첩을 보면 인사명령이 빼곡하다.....ㅎㅎㅎ

어찌되었건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군생활은 잊고 지냈고 평창 스님과 인연이 되어 기수련에 정진하고 살았다.

기수련을 하면서 느끼는건데 과거의 아픔(신체적이던지 정신적이던지)이라는 것이 보통은 완전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약의 효과이던지 세월에 따른 망각의 치유덕분이던지 묻혀버리는 것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기치료로 육체적 병증이 치유되어 막힌 기운이 소통되면서 명현현상으로 인해 통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

기치료로 인해 육체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치유가 되고 있다.

 

처음 나타난 것이 위에 서술한 동기의 죽음과 관련된 내용이다.

기수련을 하면서 명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이 동기와의 일이 떠오르면서 '이름이 뭐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8~9년 전 어느날의 얘기이니 그때라고 해도 30년이 훌쩍 지난 일인 것이다.

또 잠시 스쳐 지나갔다고 할 정도로 함께 했던 시간도 짧았는데

평소 아무런 생각도 없던 사람의 이름이라니...생각 날리 만무하다.

보통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도 생각이 안나면 그만인 것인데 갑자기 상기(上氣)가 되면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처음 이런 일을 겪다보니 당황스러웠고 어디 자문을 구할 곳도 없어 난감했다.

추운 겨울 새벽이었는데 갑자기 열이 올라 겉옷을 벗었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미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일단 찬물을 마시고 명상으로 가라앉힐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고 급기야 밖으로 나왔다.

겨울 매서운 찬바람을 쐬니 조금 가라앉는듯 해서 다시 집으로 들어와 합곡을 꾹꾹 눌러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나를 다독이기 시작을 했다.

'그 친구 이름 몰라도 돼!' '그 이름을 알고 모르는 것이 내 인생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야!'.....등 등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속에서 차가운 쇠구슬(내가 느끼기에) 하나가 뚝 떨어져나오더니 이내 발쪽으로 사라졌다. 

그러더니 거짓말처럼 이름을 몰랐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평온 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가끔 이런 상황에 놓일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를 다독이면 이내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다만 뇌 신경 사이을 막고 있던 쇠구슬이 빠져 나가는 느낌은 그날 이후로 다신 느낄 수 없었다.

 

몇 일 전에 있었던 일이다.

깨어나면 일과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수련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보낸다.

오후 4시쯤이면 다리 운동도 할겸 산책을 하는데 남한산성 초입까지 갔다가 시장에 들러 장을 보고 온다.

그런데 그날 시장에서 아는 동생을 만났다.

예전 IMF때 타격으로 인해 마음 둘 곳이 없어서 경품 오락실에 다닌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동생이다.

오락실에서는 자주 봤으니 자연스럽게 이름도 알게 되었지만 그때 잠시 만나고 안본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따로 만나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적도 없었는데 웃는 얼굴에 심성이 좋아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동생이다.

잠시 눈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수련을 하다 저녁을 먹고 또 수련을 했다.

전 날 등산을 빡쎄게 하고 왔는데 잠을 잘 못잤더니 그날은 엄청 피곤했다.

일찍 자야지 했는데 뭔가를 검색 할 일이 있어서 컴퓨터와 씨름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피곤하면서도 머리에 압(壓)이 강하게 왔다.

자려고 누웠는데 머리에 가해지는 압박으로 인해 가슴도 답답하고 각성이 되어 잠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거실로 나와 명상을 하기로 하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가슴의 압박이 심상치 않다.

그런데 그 와중에 불현듯 오후에 만난 그 동생 '이름이 뭐였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까맣게 밎고 지냈으니 이름이 생각날리 없는데 다독이면 잠잠해졌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현상이 반복된다.....ㅠ

그러기를 몇 번, 이내 통제가 안되면서 가슴이 더 답답해져 왔다.

직감적으로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청심환을 먹었는데도 쉽사리 가라앉지를 않는다.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코로나로 인해 12시 이후에는 밖에 나와 본 적이 없는것 같다.  

영업시간이 풀렸다고해도 상가들은 문을 닫았고 그때까지 문을 연 곳은 편의점과 해장국집 그리고 생맥주집이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생맥주를 파는 집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으로 바글바글 했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며 행복 해 보이는 그들을 보면서

'내가 왜 이런 수련을 해서.....ㅠ'.....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잠시 해 본다.

 

사실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는 여기까지 올 줄 몰랐고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그저 하는데까지 수련해서 건강이나 지키자고 한 것인데 결국 여기까지 왔다.

가슴이 답답한 증세는 걸으면서 찬바람을 쏘이니 좀 나아졌지만 가슴에 볼링공만한 무언가가 들어앉아 있다.

냉기인지 경직인지 잘 구분이 안갔지만 무거운 가슴(?)을 끌어안고 20여분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명상을 하면서 기운을 돌리니까 조금씩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왜 이런일이 생길까?

어릴적 우리 아버지는 별명이 호랑이 였다.

별명처럼 아주 폭력적이었는데 아마 지금 시절이었다면 아동학대로 벌써 감옥에 가 있을지 모른다.

어릴때 맞았던 이유는 (애들이 다 이러고 노는데) 바로 구슬치기, 딱지치기, 흙장난을 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 외에도 정말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많이도 맞았는데 머리가 깨지고 피가 나는것은 다반사였다.

이러니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그래서 남들보다 눈치는 빠르다)

아버지와 무슨 일이라도 같이 하게되면 몸이 굳고 식은땀이 나기 일쑤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그레 능력보다 현저하게 일 처리를 못 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일을 시키놓고 당신이 생각한 순서대로 안해도 불호령이 떨어진다.

가령 가장 좋은방법인 1-2-3-4-5-6의 순서가 있어도 어리다 보니 1-2-4-3-5-6의 순서대로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왜 3번을 하고 4번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법 한데 알려주는법 없이 결과는 같아도 순서가 틀렸다고 혼났다.

이런 아버지였으니 피하는게 상책이었다.

 

큰누나와 나는 나이차이가 많아서 내가 7~8살 때쯤 서울 서빙고동에 살때 서울 어디에선가 따로 나가 살았다.

유독 나를 이뻐하던 큰누나는 어느날 날 데리고 음악분수공원에도 데리고 가고 맛있는 것도 사주었는데

난 큰누나가 이끄는데로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느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몇일 후 아버지가 나보고 큰누나 집에 가자는 것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큰누나 집을 알려고 작정하고 간 것도 아니고 어린 마음에 아무 생각없이 큰누나가 이끄는대로 따라다닌 것인데

다시 큰누나의 집을 찾아간다면 나로서는 도저히 알 자신이 없었다.

당시 누나는 서빙고와는 달리 아주 복잡하고 번화한 곳(남산 근처 어딘걸로)에 살고 있었는데

호랑이 같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큰길까지는 어떻게 찾아갔는데 골목길은 다 거기가 거기 같아서

아무리 찾으려 해도 도무지 찾을길이 없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내 마음속의 짐도 쌓여갔다.

식은땀이 흐르고 다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 기억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갔고

결국은 온갖 욕을 다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집이 생각나지 않았을때의 강박이 지금 이름이 나지 않는 상황과 겹쳐지면서

아마도 어린시절 부터 잠복된 강박이 기수련을 통해 열리면서 치유되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동기의 이름이며 동생의 이름이 생각이 안나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나는 40살 차이가 났다.

위로 딸만 셋을 낳다가 늦으막에 장남인 나를 얻었으니 처음에는 엄청 이뻐했는데(자랑이었는지도.....ㅎ)

그것은 그것이고 폭력적인 성격은 고치지 못했다.

이런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제사 잘 모시고 있다.

처음에는 돌아가시고 꿈에 안 좋은 모습이었는데 차츰차츰 좋아지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어찌보면 우리 아버지도 나 잘되라고 그리 모질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되기는 커녕

오히려 트라우마가 쌓이면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정당화 하려고 해도 폭력적인 교육은 상처만 남길뿐 교육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사자에게 돌을 던지면 사자는 사람을 쫒아가지만 개에게 돌을 던지면 개는 돌을 쫒아간다고 한다.

원인을 알고 원인을 제거해야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기억의 통증도 수련을 멈추지 않는한 언젠가는 치유 될 것이라 확신한다.

행복한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온화함과 사랑이 함께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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