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에 사시는 채선생님이 전화가 왔다.
무주에 볼일이 있는데 같이 동행해서 민주지산을 등산하자는 전화였다.
채선생님은 인터넷으로 인연이 되어 벌써 3~4년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분이다.
공동체에 관심이 많아 원주 치악산에 터를 잡으시고 추진을 하는데
말 그대로 공동체라 여러 사람이 합심해서 해결 해야 하는 문제라서 중지를 모으기가 힘들다.
무주 신불사에 계시는 스님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소식에 방문(견학)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단다.
마침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는 상황이라서 선듯 응했다.
남부터미널에서 아침 7시 40분 차가 있었는데 무주군청 터미널을 지나 설천면 공용터미날로 가는 버스였다.
서울에서 무주까지 생각보다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다.
설천면 공용터미날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번화가가 나오는데 한적한 시골마을을 연상시킨다.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김밥 한줄로 차안에서 시장기를 떼웠기에 나는 그다지 시장기를 느끼지 못했다.
평소 아침을 안 먹는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밥 한줄을 먹었으니 시장기가 들 일이 없다.
하지만 아침을 드시고 오셨다는 채선생님은 시장하셨는지
아니면 처음 보는 스님에게 점심 공양을 해 달라고 하기 미안했는지 밥을 먹고 가자고 해서 식당에 들어갔다.
선생님 말로는 무주가 물이 좋아 올갱이가 많이 잡힌다면서 올갱이해장국을 원했지만
올갱이가 많이 잡힌다는 것도 옛말이 되어 지금은 별로 없다고 한다.
아침식사 된다는 간판을 보고 들어간 식당은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비빔밥을 권한다.
현지에서 나는 나물에 된장국이 일품이었는데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로 인해 소통에 애를 먹었다...ㅎ
식후 신불사 가는 길을 물으니 자세히 알려주었는데 결국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여서 택시를 탔다.
택시비는 신불사까지 만원이었는데 가다보니 무주가 태권도의 고장이었는지 현수막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여기에서 태권도사범 자격을 얻기 위해서 심사를 하는 기관이 있는듯 했다.
길 양편으로는 사과나무에 2붉게 익은 사과가 늘어지게 열렸고 감도 주렁주렁 열려 가을 들판을 장식하고 있다.
맑은 계곡물과 이제 시작된 단풍이 가을임을 실감나게 한다.
신불사가 공동체 마을임을 알려주고 있다.
스님은 이곳에서 30년 넘게 터를 잡고
한땀 한땀 일구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30년이 넘은 살구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죽고 살고....할 때의 살구라고 한다.
살구나무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셨는데
해박한 지식에 시간 가는줄 모르고
빠져들어 경청을 했다.
절이 있는 산사를 중심으로 산이 몇 만평 되고
그 이외에는 산보다는 주로 도로 주변의
밭이나 논을 매입했다고 한다.
주변에 돌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돌 일을
많이하게 되었는데 힘쓰는 일이 많다보니
한때는 울화통 주변이 불룩하게 혹처럼
솟아나와 애를 먹기도 했다고 한다.
신불사 경내에는 이처럼 돌 위에 부처님
두상을 올려놓은 돌 들이 많이
조성이 되어 있었다.
하긴 경내가 온통 암반이니 이런 조형물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스님의 원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경내 곳곳에 있다.
30년 넘은 살구나무며 은행나무 잣나무는
물론이고 천수답이었던 곳을 일일히
돌을 깨서 연못을 만든 것이며
30 여년 동안 주변의 집들을 매입한 것이며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의 집 매입도 끈질기게 추진해서
최근에는 200평짜리 집을 마지막으로
매입해서 해체 작업을 하고 계셨다.
스님은 불교로 출가를 해서 개종을 해서
지금은 대종교(단군을 모시는 종단) 대종사다.
머을주변 사람들은 스님이라기 보다는
대사님이라 칭하고 있었다....^^
대천궁은 불교라면 대웅전이라 보면 된다.
한달에 두번 법회를 보는데 꼭 참석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신다고 한다.
신불사 주변으로 제자들이 모여살면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벌써 자손으로 치면
제자가 5대손까지 갔다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다.
신불사 경내는 이처럼 아기자기한 오솔길도 많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 것도 이 가을의 운치를 더 해준다.
신불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이 모과나무다.
30년이 넘은 이 모과나무에는 모과가 주런주렁 열려 있었는데
뒤편 가을하늘을 담은 연못을 배경으로 탐스런 황금빛 모과가 보는이의 마음을 풍오롭게 한다.
제일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연못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이 정자처럼 생긴 공간은
보는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방 옆의 복도식 통로를 지나면 차담을 나눌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연못을 바라보며 차를 마신다면
세상근심 다 덜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오른쪽 처마에 달린 감처럼 생긴 것은
제자가 도자기로 표현한 감이라고 한다.
산이라서 기온이 내려가 제법 쌀쌀했는데
불을 때지 않으면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미리 얘기를 못하고 내려가는 바람에
이곳에서 잘 기회를 놓쳤다.
대신 스님이 기거하는 바로 옆 방에서
하루 신세를 졌다...^^
조금 전에 설명한 그 요사체다.
여기에서 보니 확실하게 운치가 느껴지는 곳이다.
여기는 원래 천수답이었는데 암반이라 연못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연꽃이 물 위에 떠서 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암반이라서 저 윗부분은 연이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또 하나 배우고 왔다.
바위위에 자리한 정자와 그 주변을 둘러산 소나무 그 아래 하늘을 담은 연못...한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우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스님이 기거하는 곳이다.
지하 1층에 지상 2층의 건물인데 지하는 말만 지하일뿐 햇빛이 잘 드는 공간이었다.
주방으로 시용하고 있었는데 스님이 직접 지어주신 공양을 하고 왔다.
절에 도착을 했을때 스님이 볼 일이 있으셔서 1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다.
나는 채선생님과 함께 신불사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저 바위 사이로 마치 관문처럼 길이 나 있었다.
예전에 평창 절에 다닐때 신도님의 집
정원에서 보고 이번이 두번째 보는
천남성이라는 식물이다.
독성이 강한 식물로 부자와 더불어 사약을
만드는데 쓰였던 맹독성식물인데 맨손으로
캐면 독성으로 인해 피부가 벗겨진다고 한다.
이것을 웅담과 섞어 말려 법제(중화)를
하는데 2년 정도 숙성(?)을 시키면 약성이
엄청 좋다고 얼마전에 TV에서 봤다.
그렇게 법제한 천남성 가격은 백만원을
훌쩍 뛰어 넘더라고요...^^
산삼 열매처럼 생겨 아름다운 저것이
맹독성을 지닌 식물이라니....ㅎ
아름다움에만 눈 멀면 안될듯 싶습니다.
막대기 하나로 가른 경계를 훌쩍 넘어서 밖으로 나왔다.
세상 모든 경계가 이처럼 확연하다면 경계를 뛰어 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보이지 않으니 그 경계가 만들어진 것을 알기도 어렵고 넘는 것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곳은 민주지산 계곡물이 머무는 <선유담>이라는 곳이다.
선유가 신선이 있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선이 머물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선유담>을 지나니 <신선동>이 나온다.
이 선유담을 따라 스님 제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스님 소유인 이땅은 제자들이 마음대로
집을 짓고 살면 되는데 공동체를 떠나면
건물 소유권은 주장 할 수 없고
그냥 떠나야 한다.
제자가 되면 3년은 머리깍고 공부해야 하는데
자립과 자력
두가지를 집중적으로 가르친다고 한다.
공부 이후에는 계속해서 도를 닦거나 직장을 다니거나 스님이 간섭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간섭 받는걸 싫어하는데 누구를 간섭
하겠느냐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붉은색은 심장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런지 붉은색을 보면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에 심장이 요동을 친다.
가을 햇살에 붉게 익은 산수유 열매를 보니 저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계곡 옆에 축대를 쌓고 터를 조성해서 집을 지었다.
한창 도배중이었는데 대학 교수라는 이 집주인도 스님의 제자라고 한다.
마치 분재인듯 키작은 소나무와 큰 항아리가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엎어진 항아리처럼 모든걸 비워야 하는데....그 욕심이라는 것이 비우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ㅎㅎㅎ
이번에 같이 동행하게된 채선생님이시다.
길 옆으로 늘어선 것이 살구나무입니다.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산 타시는 모습이
젊은이 못지 않았다.
젋었을 때부터 오랜시간 산행을 한 덕분인가 보다.
흐드러지게 핀 구절초 사이로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시고 있다
산행을 하다보면 자주 느끼는 것이다.
저 바위 틈에서 어떻게 저런 식물이 굵고 튼실하게 자랄 수 있는지 경이롭다.
산수국이 황금빛 햇살을 받으며 꽃을 피우고 있다.
많은 표정을 담아내고 있는건 아니지만 많은 얘기를 담아내고 있는 표정이다.
세상을 달관하고 눈을 감고 서있지만 마음의 환희심은 감출 수 없는지 함박 미소를 짓고 있다.
돌아가신 분을 화장해서 부도탑처럼 모셔 놓은 곳이다.
스님의 어머님도 여기에 모셔 놓았다고 한다.
다른 언어로 표현하면 무덤이지만 탑과 주변의 소나무 파란 하늘이 그런 감정을 잊게 해 준다.
이곳은 스님이 주로 차담을 할 때 쓰는 공간이라고 한다.
들어가는 입구의 나비문양이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이곳 반대편은 낭떠러지다.
벼랑을 이용해서 집을 지었는데 위태로움은 기우에 불과하였다.
이날 베란다에 서서 창 밖으로 내다본 전경은 장관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나뭇잎이 소란스럽게 흔들리는 풍경과는 반대로 집 안은 아늑하였다.
이 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다른 세싱이 있을까?.....보면서도 의심이 들 정도였다.
햇살 깊숙하게 들이미는 창가에 앉아 좋은 얘기 들으며 마시는 차는 더 없이 좋은 추억이었다.
차담을 하는 방답게 각종 다기가
작은 진열장에 잘 정돈되어 있었는데
탁자 위 이 작은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모르게 정갈하고 단아한 느낌이 든다.
이 오른쪽에는 신문이 놓여 있었는데
스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것을
스크랩 해 놓으셨다.
단군설화라 배운 얕은 지식으르 가지고
스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때론 통쾌하고 웅장한 서사시를 읽는 듯한
그런 시간이 되기도 했다.
역사이건 설화건 아니면 소설이건 간에
우리나라의 기상을 한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밖을 나오다가 보니 눈에 띈 꼿이 바로 이꽃이다.
작은 꽃봉오리가 모여 큰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작은 하나의 꽃봉우리지만 그 많은 봉우리가 모여 군락을 이루듯이
하나의 개개인 사연들이 모여 만들어 지는 것이 역사인듯 싶다.
밤에 채선생님하고 이런 저런 애기를 나누다 보니 12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산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청했지만 쉽사리 잠이오지 않았다.
돌이 많은 집은 보기에는 좋아도 사람 살기에는 좋은 집터는 아니다.
특히 땅 속에 묻힌 바위는 풍이나 암 등 질병을 일으키기 좋은 터인데
그나마 여기는 바위가 밖으로 노출된 곳이라 금(金)의 기운이 덜 하지만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평창스님 말로는 심장기운이 강한사람, 그래서 열이 많은 사람을 빼고는 양석이라고 해도 좋지 않다고 했다.
잠이 안 와서 뒤착이다 보니 시간이 1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잠이 안 오는데 억지로 누워 있다고 한들 잠들기는 힘들다.
결국 일어나 기운을 돌리다 보니 아마 3시는 되었음직 한데 약간 피곤함이 몰려 온다.
이때다 싶어 얼른 이불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는데 다행히(?) 바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7시쯤 일어나 보니 채선생님은 일어나 명상을 하고 계셨다.
햇살이 눈부신게 오늘 날씨가 쾌청해서 등산하기 좋은 날인듯 싶었다.
민주지산....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등산은 산의 높이 만큼이나 설레이기에 오늘도 좋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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