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마음의 눈

敎當 2017. 4. 10. 13:45

마음의 눈을 뜨고 지혜의 광명을 보면 내가 부처요, 이 사바세계가 극락이다

 

마음을 가리고 있는 번뇌의 구름을 걷고 지혜의 광명을 볼 때

중생들은 비로소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 영원한 생명 속에 무한한 능력을 가지는

대해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스님은 또한 일러주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 윤회를 벗어난 영원한 자유와 절대적 행복이 있으며

이 광명은 영 겁이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요.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 고 중생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는 어떤 방법으로 될 수 있는가요?

스님은 거기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바로 화두참선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 일상과 몽중과 깊은 수면의 경계에서도

오로지 화두를 참구하여 근본 무명까지 없어진 구경에 이르게 되면,

마음에 쌓인 먼지가 다 없어져서 본디부터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불성

곧 자신의 부처를 자기의 힘으로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화두를 참구하여 자기의 본래 면목을 보려면

첫째로 잠 많이 자지 말라,

둘째로 말 많이 하지 말라.

셋째로 책(경전)을 보지 말라.

넷째로 간식하지 말라.

다섯째로 돌아다니지 말라는 수좌5계 를 남기셨습니다.

 

해탈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욕심 때문에 마음 거울에 때가 묻었으니

욕심이 다 없어지면 결국 마음의 거 울의 때가 하나도 없어져서

자기의 본래 면목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이 번뇌망상 그 먼지만 닦아내면 내가 바로 부처며

이 자리가 극락이라고 하면서 중생과 사바세계에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선가의 오랜 가풍인 '돈오돈수'를 설파하다

 

스님은 또한 조계종의 종조 문제를 대담하게 제기합니다.

오십년대 정화운동 뒤로 새롭게 자리 매김 하려던 '보조스님 종조설'을 전면 부인한 것입니다.

한국 불교의 종조는 본디 태고스님이었습니다.

이에 성철스님은 한국 불교가 조계 혜능스님을 원조로한 임제종의 법통을 이은 선종이며

종조는 태고 보우국사임을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종조문제와 돈수, 점수 논쟁으로 성철스님은

한국 불교 조계종이 모두 우러르는 고승 보조스님과 대립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보조스님은 선과 교를 융합시키려고 힘썼으나

그 결과 교가적인 돈오점수 이론을 선가의 종지로 내세우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한국 불교는 언제부터인가 점수 사상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성철스님이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설파하기 시작하자,

한국 불교계는 한동안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논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나중에 오매일여가 되고 안팎이 명철해져 거기서 한 눈 뜨면 깨친 것이, 견성이지.

그러기 전에는 병난 거여."

 

화두를 참구해서 마침내 아주 작은 망상까지도 없어진 구경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본원 자리에 단박 깨달아 들어가는 돈오돈수가 선종의 본디 사상인 것입니다.

이에 성철스님은, 선사들 의 어록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한 <선림고경총서> 서른일곱 권을 내어,

돈오돈수 사상이 비단 스님만의 주장이 아니라 역대 선사들의 오종 가풍임을 밝혔습니다.

 

큰스님께서 해인총림 방장으로서 백련암에 머무는 동안

해인사는 눈에 띄게 그 면모가 새로워졌습니다.

큰절과 산내 암자가 크게 발전하였는가 하면 선원, 율원, 강원을 두루 갖춤으로써

명실 상부한 총림의 면모를 지니게 두었고,

무엇보다도 서릿발같은 선풍(禪風)의 기강을 드높임으로써 청정한 수행 도량을 이루니

오백여 명에 이르는 산중 대중이 부처님의 혜명을 이으려고 밤낮없이 정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70년대 말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한국 불교는 또 한 차례의 거센 부침을 겪어야 했습니다.

 

해방 뒤로 시작된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분규와

조계종 내부의 종권 다툼으로 승려들의 기강이 크게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군부는 또 다시 정화라는 이름으로 세속의 칼을 들이대었습니다.

그것이 현대 한국 불교의 최대의 치욕이라 하는 198010.27 법난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위기의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던 한국 불교계가

그 때에 선택한 분이 바로 성철 큰스님이었습니다.

큰스님이야말로 허물어져 가는 불교를 받쳐줄 기둥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철 큰스님은 "내 이름을 빌려주어서 불교가 중흥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며 제7대 종정직을 수락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던 성철 큰스님은,

이 때에 취임법어 하나로 대뜸 세간을 술렁이게 하면서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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