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가야산 해인사

敎當 2017. 4. 12. 14:51

삼십년 남짓 가야산 해인사를 떠나지 않은 '가야산 호랑이'

 

"종정 안 한다는 말만하지 말라고 해서 종정이 되었으나 산중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스님은 종정 취임식장에 가지 않았을 뿐더러

1991년에 다시 제8대 조계종 종정에 재 추대되어 입적하기까지

끝끝내 산승이기를 고집하여 평생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일찍이 그 박학다문함과 장좌불와 팔 년, 동구불출 십 년 같은 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거니와,

또 그 독보적인 사상과 선풍으로써 이 땅의 불교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성철스님은,

1967년 이후로 줄곧 가야산 해인사를 지켜 오는 동안에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습니다.

 

공부하는 대중스님들을 늘 잔뜩 긴장시키던

그 불길 서리 같고 서릿발같은 가르침의 엄격함 덕분에 얻은 이름입니다.

정진 중에 어느 스님이 잠깐이라도 졸음에 빠질라치면 이내

 " 이 도둑놈아, 밥값 내놔라!" 하는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와 함께 등줄기에 장군죽비가 날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상하고 유머도 풍부하며 짐짓 장난스러운 면모도 드러내고는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퍽 좋아하여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꼭 천진무구한 아이 같았고

도반들과 함께 있을 때면 씨름을 하기도 하면서 짓굳은 장난을 예사로 하였습니다.

법문사이에 끼여드는 우스갯소리도 여간 구수하지 않았습니다

 

청빈한 수행 납자로서 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또 큰스님은 "도를 이루려면 가난부터 배워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식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며 소식으로 일관해 왔는가 하면

여름에는 삼베, 겨울에는 광목으로 옷 한 벌에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내는 청빈한 삶을 이어 왔으니

그나마 그 한벌 옷도 여든 나이가 되도록 손수 기워 입었습니다.

"스님, 입고 계신 옷이 저희가 보기에는 상당히 남루하고 누더기입니다만 몇 년 동안 입으셨습니까 ?"

"삼십년 넘었어. 이 옷이 두 갠데, 번갈아 가며 입어. 삼십년 넘었어. 거의 사십년 됐어."

"평상시에 안 입고 예식 있을 때에만 입으십니까?"

"장 입고 다니는 옷이라."

"늘 입고 다니시는 옷이군요."

"오늘 특별히 입고 나온 줄 아는 모양이네. 나 장 입고 다니는 옷이야."

" . . . . . . . "

"나 제일 못났기 때문에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어. 아무 자격이 없는데 좋은 옷 입을 수가 있나."

스님을 찾아온 어느 기자와의 대화 한 자락입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1993114일 처음 출가한 그방 퇴설당에서 열반에 들다

 

그러나 큰 스님은 삼십 년 남짓 한결같이 다니던 가야산 포행길을 언제부터인지 힘겨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야산 호랑이도 한 자락 가사 밑에 어느덧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뭐를?"

"일천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한 말씀만?"

"내말에 속지 마라."

"자신의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 . . . ? "

"내 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 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1993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 법어집'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 되는 것을 보고 나서

두 달 만인 그 해 114일 아침에 성철 큰스님은 열반하였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는 말을 던져주고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그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스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선 잘하라 !"

그 한 말씀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에 드니, 행운유수(行雲遊水)의 사문의 길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랍 59, 세수 82세로 큰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지라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 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침내 생사를 벗어나 적멸에 든 큰스님은 입적한 지 이레째 날

평생을 주석한 해인사 퇴설당을 떠나서 일주문 밖에 마련된 연화대로 향하였습니다.

그날, 퇴설당 위로는 일시에 새떼가 날고 다비장에서는 때늦은 낙엽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스님 떠나던 그 날도 그러더니

백련암 뒷산 하늘에서는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환한 빛이 피어올랐습니다.

이는 드물게 보는 방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시간이 넘게 걸린 다비는 일백 여과에 이르는 영롱한 사리를 남겼습니다.

다비식에서 사십구재에 이르는 동안 큰스님의 떠남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뭇 대중의 발길은

해인사 앞뜰을 가득 메우며 끊일 줄 몰랐습니다.

 

아직도 가야산의 메아리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전의 가르침

 

성철 큰스님은 속인으로 왔다가 끝내 부처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부처'로 불리는 까닭은, 오직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용기,

그리고 그 결의를 평생토록 지킨 남다른 실천궁행 때문입니다.

 

큰스님 가고 없는 가야산,

그러나 한 평생 오롯한 선승의 길을 걸어 온 큰스님의 자취는 지금도

매서운 죽비소리가 되어서 날마다 새롭게 우리 곁에 다가 옵니다.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참회하고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누누이 이르시던,

그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으로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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