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봉암사 결사

敎當 2017. 3. 31. 14:26

해방과 더불어, 봉암사 결사를 이끌며 불교 중흥의 길을 마련하다

 

그러던 중 일제로부터 나라가 해방되었습니다.

해방은 스님들에게 한국 불교의 본래 면목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한국 불교를 살리려면 총림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 때 마침 효봉 큰스님이 해인사에 <가야 총림>을 열었으나 청담스님만 참여하고 성철스님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뒤에 두 스님은 다시 논의하여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로 함께 거처를 옮겼습니다.

성철 스님은 "이 좋은 도량에서 함께 열심히 정진하자"며 울산에 머물고 있던 향곡스님도 봉암사로 불러들였습니다.

불법을 바로 세우려는 스님들의 청정한 의지가 바로 이 희양산 산자락에서 처음 태동됩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봉암사 결사'가 그것입니다.

 

성철스님이 이끈 봉암사 결사는 선종 본디의 종풍을 살리고 옛 총림의 법도를 이 땅에 되살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젊은 수좌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니

청담스님과 향곡스님을 비롯하여 자운, 월산, 우봉, 보문, 성수, 도우, 혜암, 법전스님 등

모두가 뒷날 한국 불교를 이끌어나간 굳건한 동량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뒤에 종정 두 명과 총무원장 세 명이 나왔을 뿐 아니라

여러 선방의 조실로 종단의 지도자가 되지 않은 스님이 없었습니다.

당시 봉암사의 분위기는 조사의 도량으로서 그 청정한 긴장감이 사뭇 대단했습니다.

 

법(法)의 구름이 도량을 덮고 있는 듯했지요.

다시 한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지금 봉녕사 학장 스님으로 있는 묘엄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전통이 있기에 봉암사는 지금도 일반 사람의 발길을 막아 산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서

결제 와 해제가 따로 없을 만큼 꼿꼿한 선풍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철스님은 이 때에 '공주규약(共住規約)'이라 하여 대중이 함께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규칙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는 부처님 법대로 살려는 참으로 엄격한 실천궁행 이었습니다.

 

첫째,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구경의 큰 결과를 원만히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둘째,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각자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셋째,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주자치(自主自治)의 표지 아래에서

         물 기르고, 땔나무 하고, 밭에 씨 뿌리며 또 탁발하는 등 어떠한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넷째, 소작인의 세조와 신도들의 특별한 보시에 의한 생활은 이를 단연히 청산한다.

다섯째,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은 열두시를 지나지 않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여섯째,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일곱째, 방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고 서로 잡담을 엄금한다.

 

'한국 불교의 르네상스'라고 할 이 봉암사 결사는

성철스님 생애에서도 퍽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거니와

오늘날 우리 불교가 지니고 있는 질서와 형식이 거의 모두 봉암사 결사에 뿌리를 두고 있느니 만큼

불교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처럼 이루어진 이 중흥 불사는 안타깝게도 육이오전쟁 직전에

희양산 일대가 좌익, 우익의 전략 거점으로 짓밟히면서 몇 해 되지 않아 무산되고 맙니다.

, 우의 대립이 퍽 심하던 그 때에

스님이 어쩌다 행각중에 토방에서 장좌불와를 하고 있으면 밤중에 사람들이 슬며시 찾아와

"앞으로 좌익이 이길까요. 우익이 이길까요? 제게만 살짝 알려 주십시오"하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한결같이 "나는 사문이라 그런 것은 모른 다"고 대답했고

그러면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거나 심지어는 욕을 퍼붓기도 했다고 합니다.

 

안정사 천제굴 시절, 그 유명한 삼천배 기도를 처음으로 시키다

 

육이오전쟁 뒤에 성철스님은 월내의 묘관음사에 이어 통영 은봉암에 얼마 동안 머뭅니다.

그러다가 안정사 앞 골짜기에 초가 세 채로 된 토굴을 짓고 천제굴闡提窟이라고 이름하여 그 곳에 주석합니다.

그 때에 근처의 많은 선남선녀들이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발심 하여 출가하는 일이 잇달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철스님 믿다가는 집안 망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스님의 법문은

유한한 인생에서 일시적인 행복을 버리고 영원한 행복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는 높고 깊은 설득력을 지녔던 것입니다.

 

스님은 이 곳에서 처음으로 신도들에게 그 유명한 삼천배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을 만나려면 젊은이든 노인이든 재벌이든 장관이든 누구 할 것 없이 먼저 부처님 앞에서 삼천배를 해야 했습니다.

절은 그 행위 자체가 참회요 공덕인 것입니다.

삼천배는 그것을 삼천 번씩 되풀이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마음의 때를 닦아 없애 나가는 과정입니다.

스님이 신도들에게 예외 없이 삼천배를 시킨 까닭은

아마도 쉬임 없이 무릎과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 하며 삼천 번 절하는 동안에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스스로 마음의 먼지를 닦아 없애서 자기를 바로 보게 하려는 방편에서였을 터입니다.

 

스님은 또 삼천배 기도 말고도 신도들을 위한 수행 방법의 하나로서

아비라 기도라는 독특한 예불의식을 만들어 전해 주었습니다.

이 아비라 기도는 삼천배의 예배 절차와 함께 그 뒤로도 줄 곧 이어져

큰스님 살아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해인사 백련암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철스님은 이렇듯 신도들에게 기도를 통한 참회와 수행을 철저히 가르치는 한편

당신 스스로도 평생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일체 중생을 위한 백팔배 참회 기도를 함으로써 수행의 모 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암에 철망을 두르고 십 년 동안 한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다

 

정화(淨化) 운동이라 하여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투쟁이 불거지던 무렵입니다.

한평생 수행자의 길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던 스님은 정화 운동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절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며 수행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절 뺏기식의 정화가 되어 자칫 잘못하여

묵은 도둑 쫓아내고 새 도둑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그 간곡한 뜻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스님은 1955년 겨울에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그 뒤로 십년동안 한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십 년에 걸친 동구불출(洞口不出)!

팔 년 장좌불와에 이은 또 하나의 신화를 이룬 것입니다.

스님은 퇴락한 성전암을 수리하고는 그 둘레에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그렇게 둘러친 철조망안에서 일체의 바깥출입을 삼가면서 스님 은 차곡차곡 한국 불교의 앞날을 준비하였습니다.

수많은 불경과 조사어록을 공부함은 물론, 과학과 수학 같은 학문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바깥에서는 불교 정화라는 이름으로 대처승과 비구승의 투쟁이 한창일 때

스님은 시류를 멀리한 채, 한국 불교의 진정한 내적 정화를 위 해 든든한 징검다리를 놓고 있었으니

곧 뒷날 <성철불교>라 일컫게 된 독보적인 불교 이론과 실천 논리를 확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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