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이야기/사는이야기

충고와 잔소리

敎當 2009. 12. 31. 09:30

몇 일전 절에 같이 다니던 신도분이 전화를 했다.

이 신도 분은 정말이지 개념이 없는 분이었는데

요즈음 절에 다니는 취미를 붙이셨는지 열심히 다니며 보시 아닌 보시를 하고 다닌다.

보시 아닌 보시라 한 것은 타인을 위해서는 십원 짜리 하나 쓰는 것을 벌벌 떨면서

절에 시주 하는 것은 본인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관계로 몇 백만원씩 팍팍 시주를 하신다.

그래서 신명이 났는지 이리저리 신도들에게 전화해서 이 말 저리 옮기고 저 말 이리 옮기고

좀 유별나서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이다.

요번에는 또 전화해서는

“왜 아직도 절에 안 나오느냐? 누구는 왜 요즈음 절에 안 나오는지 알고 있느냐?”

일방적으로 묻고 마음대로 정의를 내린다.

이번에는 전화 말미에 내가 스님을 욕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그러더냐고 묻자 이내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절에 가면은 마음을 닦으러 가는 것인데

요즈음은 절에 가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절에 가는 것을 자제하고 집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

처처불상이란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절에 가면 기도처요 그 밖의 장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절에 가야지 사람구실 좀 하고 그 외에는 막사는 삶이 될 것이다.

전화를 끊고 곰곰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과연 내가 스님을 욕하고 다닌적이 있었던가?”

욕설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1.남을 저주하는 말

2.남을 욕되게 하는말

3.남을 모욕하는 말이라 정의되어 있었으며

한문의 파자적 욕의 의미는 별(辰)처럼 빛나는 사람을 시기하여 하는 한마디(寸)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서운한 감정을 가지는 경우가 왕왕 있게 마련이다.

안보는 데서는 임금님도 욕을 한다는데 저주 까지는 아니더라도 칭찬 일색의 말은 안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화를 통하여 말을 주고 받은 사람은 신도 간에 3명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때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하세요!”라고 말한 분은 단 한명도 없다.

욕을 한 기억도 없지만 욕을 했다손 치더라도 동조 내지는 방관하고 있다가

당사자에게 마치 자기는 진정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사실 그대로 전달했어야 하는데 보태서 얘기하지 않았으면 다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욕이란 내 주장의 강한 표현이다.

자기주장을 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한다면 욕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인 것이다.

다만 강하냐 강하지 않으냐의 차이는

내가 주체가 아니라 상대방이 가지는 주체성에 의하여 좌지우지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대방이 못 알아듣거나 배척해버리는 의견이라면

그것은 이미 좋은 충고가 아니라 잔소리 내지는 조금 과장하면 시비가 되는데

사심이 있던지 없던지 간에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 강하게 설득시키려 하면 욕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받아들이는 이가 잔소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잔소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원래부터 충고도 욕도 없는 것이며 단지 받는 이의 생각에 따라 이것이 되기도 하고 저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설령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점이나 고쳐야 할 방향의 제시를 강한 어조로 얘기해서

남이 듣기에 욕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때 그 자리에서 당사자가 듣지 않았으면

그 당사자는 내 욕으로 인하여 마음에 아무런 갈등이나 동요의 단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것을 전달한 사람이 있으므로 해서 마음의 동요나 갈등이 생겨났다면

이는 그 말을 전달한 사람이 욕을 한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좀 비약적인 논리이긴 하지만 만약 갑이 을의 집에가서 음식을 먹고 변을 보았는데 그 변이 을의집 음식이라 정에게 했더니 정이 그 변을 을에게 퍼다 주었다면 과연 을은 누구에게 혐오감을 느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요즈음 살짝 종교에 회의를 느끼며 살고 있다.

정말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곳이 종교 집단이라는 생각이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요즈음 절에 가도 부처님이나 불법은 없고 자기 자신만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염불하기 위한 가사 정도로 깨우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서울대 수 십 년을 들락거려도 공부 안하면 똑똑해 지지 않듯이 절에 수 십 년을 다닌다고

불자가 되여 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충고로 들을 것인지 욕으로 들을 것인지 나도 마음공부나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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