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이야기/사는이야기

부처의 눈

敎當 2009. 11. 16. 09:02

예전에 나의 학창시절에는 도덕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먹고 살기가 힘들다보니 경제 즉 먹고 사는 일에만 치중을 하게되고

양심의 가책이 되는 일을 하면서도 “뭐 이정도 쯤이야 먹고 살려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위안을 삼다보니 도덕적으로 해이해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선과 악을 구분하고 좋은일 나쁜일을 철저히 구분하며 살으라 배웠던 시절의 과목이 도덕이었다.

선악의 구분이 잘 지켜지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도덕으로 무장을 하고 그래도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으면

죽어서도 심판을 받아 선인 선과 악인 악과에 의해 지옥과 극락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윤회를 하면서까지 그 업을 소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불교에 귀의하는 것으로 보아

막연하게 불교란 철저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실천하는 또 그래야만 하는 종교인 것으로 각인하며 살아왔었다.

그러던 것이 불교에 입문하면서 처음으로 받은 충격이 분별심을 없애라는 말이었다.

고집이 세다는 말을 누누이 들어온 터여서 학교에서 배운대로 선악을 철저히 구분하며 살다보니

제법무상의 원리를 모르고 칭찬에는 인색하고

(선한일을 해야 함이 사실 당연한 것이니까 딱히 칭찬해야 할 필요를 덜 느꼈을지도 모른다)

소위 악한일(철저하게 내 기준이었지만)이라 생각되는 일에는 가차없이 칼을 들었으니

주변에 무수히 많은 적들이 생기게 되고 그 결과로 가슴앓이를 하면서 살다보니 병을 얻게 되었다.

분별심이라......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도 생기고 저것이 없음으로 해서 이것도 없어진다는

그 평범하면서도 오묘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학교에서 요즘 말로 초딩에게나 가르치는 진리를

성인이 되어서 까지 가지고 살다 병을 얻었다니 내가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이 자리에서 보니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어찌 되었건 불교에 입문하고 보니 현제 경제적으로는 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다.

그 많은 욕심도 조금은 덜어내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다.

담배연기 자욱한 밀폐된 공간에서 술먹고 떠들던, 전혀 상대방은 관심도 없는

나라걱정 직장불만 바른정치 신변잡기등의 얘기를 상대방에게 주입하려다 보니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하던 시절을 지나 그 시간을 아껴

등산하고 책 읽고 명상하는 시간으로 바뀐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부처님 법을 알아가는 재미가 술 먹고 떠드는 재미보다 훨씬 좋음은 물론이다.

법문을 듣고 깨우쳐 가는 재미가 현제는 제일이었다.

 

얼마전 누가 나에게 빵을 주는데 그걸 내가 받지 않으면 그것은 도로 날 주려던 사람의 것이 된다는 법문을 듣고

마음 쓰는 법을 깨우친 적이 있었다.

욕을 해도 그것을 받지 않으면 욕을 한 사람의 것이 된다는 요지의 말씀이셨는데

빵은 덩어리라 안받으면 그 흔적없이 다 되돌릴 수 있게 되지만

욕은 내 귀로 들어와야 욕인줄 알 수 있다.

즉 받아야지만 욕인줄 알 수 있으니 안받는 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물건은 되돌리기가 쉽지만 마음은 결국 마음으로 밖에 되돌릴 수 없으니

어지간한 공부가 되지 않으면 안 받는 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하긴 쉽지가 않으니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이겠지만............

얼마전 다른 절의 스님으로 인해 댓글 사단이 났을 때

내가 다니던 절의 스님께서 이 법문을 이용해서 댓글을 달으셨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다른절 스님의 그 글을 안받으면 되는 것을(앞부분)/ 그동안의 마음공부는 어디가고 옹졸하게 왜 그리 대응하느냐(뒷부분)는 내용이셨다.

앞의 내용은 지혜로써 헤쳐 나가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뒷 부분은 방법을 질타하는 마음을 내셨다.

마음을 냈다는 얘기는 이미 분별이 생겼다는 말일 것이다.

불교를 혹자는 한마디로 하면은 마음공부라 마음 心자 하나로 대변할 수 있다고 한다.

일체유심조라 할 만큼 마음의 인식 작용이 중요하고 죄 또한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이라 죄는 자성이 없어서 마음 따라 일어나니 그 마음이 없어지면 죄 또한 없어진다는

천수경에 나오는 유마거사의 말씀처럼 마음한번 돌리라 했을 때 증오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스님이 뒷부분의 마음을 내지 않았다면 앞부분은 지혜가 되지만

마음을 내었기에 앞부분은 이미 그 지혜의 빛을 잃고 비호 내지는 두둔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내 공부가 짧아 그리 오해하고 마음의 인식 작용을 잘 알지 못하는 처신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스님이 내 마음을 돌리고자 글을 내었기에

내 마음이 중요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나 같으면 어찌 되었건 인터넷을 이용해서 결과론적으로 둘 다 추한 모습을 보였으니

스님도 잘 못 되었지만 나도 잘 못 되었으니 절에 와서 얘기하자는 말이

마음을 내었어도 좀 더 설득력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삼보란 불·법·승을 말함은 불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고 함은 부처님과 경전과 스님을 비방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스님이 불자를 비방해선 안된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경전에 없는것 아니냐는

저번의 얘기는 그만 두더라도 삼보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삼보란 세가지 보배라는 뜻이니 보배란

이 세상에서 희유하고 변함이 없으며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다이아몬드를 하수구에 넣어도 그것은 다이아몬드이지 쓰레기가 될 수는 없다.

하수구에 떨어져도 보배는 때가되어 해가뜨면 그 속에서 영롱한 빛을 발한다.

구정물이 다이아몬드를 어찌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빛에 하수도 구정물의 탁한 빛을 잃는다.

진정한 보배라면 비방이라 생각하지 말고

깨우침을 달라는 소리로 듣고 중생을 구제하는 빛과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는 말이 어느틈엔가 스님의 전용 방패가 되어 있다.

말문이 막히면 이 방패가 위력을 발휘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출판:아름다운 인연 >의 저자 도법스님은

이 책 제목만으로도 능지처참(죄송)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만물은 각자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초목도 분명히 운다는 표현을 쓰고 바다도 운다.

감정 표현을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기공부를 통한 기감이 아니더라도 만물이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 소통을 하고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내가 지금 미국을 보지 못한다고 미국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는세계 아는세계는 얼마나 작고 하찮은 것인지 모른다.

세균도 보이지는 않지만 활발히 움직인다.

세균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해도 세균의 세계는 있다.

세균은 너무 작아서 안보이는 것일까?

그럼 이 우주는 얼마나 큰데 보지 못하는 것인지.........

 

조금 깨달은 사람이나 스님은 자꾸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말한다.

중생의 눈으로 보니 스님도 있고 선각자도 있고 부처도 있고 하는 차등이 생기는 것이리라.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만물을 대하라는 스님은 과연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

잘은 몰라도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부처와 중생 단 두가지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처의 눈으로 본 세상은 부처를 빼면 만물은 차등이 없는 평등

즉 수직이 없는 수평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말일 것이다.

어리석다 지혜롭다는 표현도 결국은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중생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음이 아닐까 한다.

분별이 떠나지 않은 자리에 있고 상이 떠나지 않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별하고 분별하고 분별해야 분별심이 없는 자리를 알것이다.

사유하고

사유하고

사유하라.

이것이 지금 내가 가진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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