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상기병

敎當 2018. 9. 5. 11:32

해인사 큰절 행자실에는 '하심(下心) ' 이라는 붓글씨를 걸어두고 있다 

 

쉬운 글자인 만큼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마음을 내린다' '마음을 아래로 한다' '남에게 겸양한다' 는 등등. 여러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 바닥에 흐르는 공통된 생각은 분명하다.

'남을 대할 때 내 마음을 아래로 한다' 는 것이니

누구에게나 나를 굽히고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이 행자들의 제일 덕목이란 뜻일 것이다.

 

어떻든 몸을 낮춰보겠다는 결심의 날을 세우면서 보낸 세월이 지나고

부엌 살림을 졸업하는 날이 찾아왔다.

공양주 8개월, 큰스님 시찬 15개월여.

 

거의 2년만에 부엌을 떠나게 됐다.

일의 성격상 부엌살림 살면서 무슨 자존심이며 오만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다.

그런 생활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에 하심을 심으라는 뜻이 감춰져 있는 것이 행사의 소임인 듯하다.

나도 행자이던 그 때 그 시절,

그렇게 하심을 배웠던 것 같다.

 

공양주와 시찬 소임을 마치고 큰스님 시자(侍者) 소임을 맡게 되었다.

시자 소임은 큰스님이 시키는 잔심부름을 하고

산이나 큰절로 포행 나가면 따라가며 수발도 드는 임무다.

성철스님은 뒤따라 오는 시자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온다.

워낙 의외의 질문을 많이 하는지라 떠듬떠듬 대답하곤 했다.

그러다 큰스님이 느닷없이 눈을 부라리며 던지던 질문이 있다.

 

"지금 니 내한테 말하는 중에 화두가 들리나?"

 

큰스님의 질문에 한참 대답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데

갑자기 "화두 들리나" 라고 물으니 달리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지금 화두 없심더. "

 

큰스님은 늘상 예상했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 그렇지, 니가 별 수 있겠나. "

 

어느 여름날 성철스님을 모시고 큰절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몸에 열이 많다며 겨울에도 윗 속옷을 입지 않는 성철스님이다.

아무리 산중이라지만 여름에 암자로 오르다보면 몹시 덥다.

그럴 때면 큰스님은 윗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성큼성큼 산을 올랐다.

시자인 내가 쑥스러운 마음에 말문을 열었다.

 

"스님, 깊은 산 속이지만 혹시 누구라도 오면 어쩌시렵니까"

 

큰스님은 이전에도 이런 말을 많이 들었던 듯 픽 웃었다.

 

"그 자슥, 걱정도 팔자네. 나는 지금 바지도 다 벗고 오르고 싶은데...... 그런데 화두는 들리나?"

 

이렇게 시자를 살면서 "화두 잘 되나" 는 질문을 자주 받게 되니 자연 신경이 곤두섰다.

화두를 한 번이라도 더 들어보려고 애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가 슬슬 아파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좌복 위에 앉아 참선하려고 화두를 들기만 하면 머리가 아파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몸이 약해서 그런가' , 아니면 '()가 허()해서 그런가' 하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도저히 나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엔 머리가 깨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참기 힘들어 성철스님에게 물었다.

 

"머리가 아파 참선을 하기 힘듭니다. "

 

"우째 아픈데?"

 

"걸어다니면 좀 낫고,

좌복 위에 앉아서 화두를 들려고만 하면 화두는 어디 가 버리고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픕니다. "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 안했나?

상기병이 왔구먼.

건 약도 없어.

화두를 놓고 쉬어야지 안 그러면 점점 더 병이 깊어지지.

그래도 화두를 완전히 놓지 말고 좌복 위에 앉아

숨을 발바닥 중심까지 끌어다 쉬는 기분으로 정진하면 차차 상기병이 나을 것이다. "

 

성철스님의 자상한 설명이 이어졌다.

 

"부처님께서 가르친 것이 있다 아이가.

거문고 줄을 다루듯이 너무 탱탱하지도 말고 너무 느슨하지도 말고,

줄을 잘 고루어야 좋은 소리가 나듯이 공부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화두 공부도 억지로 우격다짐으로 머리 속에 넣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쉬어가면서 천천히 해 봐라. "

 

참선하는 스님들의 고질병인 상기병은 쉽게 낫는 병이 아니다.

큰스님은 "내 시킨 대로 해 보니 병이 다 나았제?" 라며 수시로 물었다.

대답은 ". 좀 나아지는 것 같심더" 라고 하면서도 큰 차도를 느끼기 힘들었다.

나중엔 좌복 위에 앉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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