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는 잘 되나?"
성철스님이 수시로 물어보는 말이다.
큰스님이 내게 내린 화두 삼서근(麻三斤) 을 염두에 두고 얼마나 참선을 잘 하고 있느냐는 점검이다. 참선수행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큰스님의 제일 관심사는 제자들의 공부였던 셈이다.
우리나라 선(禪) 불교 전통에서 화두를 정해 수행하는 것을 흔히 '화두를 든다'
또는 한자어로 '참구(參究.참선하며 연구함) 한다' 고 표현한다.
큰스님이 입버릇처럼 물었던 '화두는 잘 되나' 라는 질문은 곧 '참선수행의 진전이 있느냐' 는 의미와 같다.
처음엔 좌복(참선용 긴 방석) 위에서 다리를 포개고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 자체도 힘들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렇다고 화두가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망상만 한 편의 영화처럼 계속 반복해 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돌아가던 영화 필름이 뚝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 영화가 안 돌아가네!"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금방 깨칠 것 같은 기대감이 확 들었다.
얼마나 좋은지 곧장 성철스님 방으로 달려갔다.
"큰스님, 이제 영화가 돌아가지 않심더. "
큰스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 얼굴을 쳐다봤다.
"이놈아!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노?"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금까지 지나온 삶이 마치 영화처럼 꼬리를 물고 돌아가니 화두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
이제 그런 증상이 없어졌다는 것까지 얘기가 끝나자 성철스님이 다시 묻는다.
"그래 화두는 잘 되나?"
그 물음을 받고 다시 생각해 봤다.
영화 돌아가는 것은 멈췄는데 그렇다고 그 자리에 화두가 들어앉은 것은 아니었다.
"화두는 여전히 들리지 않습니다. 영화만 끊어졌을 뿐입니다. "
"그러면 그렇지. 니가 뭐 공부하는 게 있겠노?
영화 안 돌아간다고 공부되는 것은 아이다. 화두가 들어서게 더 열심히 해야지. "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었다.
낮에는 머리 속에서 영화가 사라졌는데 꿈 속에서 그 영화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꿈이란 꾸고 싶다고 꾸고, 꾸고 싶지 않다고 안 꾸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평소에 꿈이 별로 없는 편인데, 갑자기 꿈속에서 영화가 돌아가기 시작하니 그것도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참 내가 전생에 지은 죄가 많긴 많은가 보다. "
나 스스로 자책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꿈속에서 돌아가던 영화도 어느 날 문득 멈추었다.
왜 멈추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출가 후 무려 2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는 머리 속의 영화 한 편과 힘겨운 씨름을 벌인 꼴이었다.
절집에는 차담(茶啖) 시간이란 게 있다.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던 제자들이 차를 놓고 한 자리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다소 자유로운 휴식시간인 차담 시간이면 먼저 출가한 사형들이 이런저런 얘기들을 사제들에게 들려준다.
하루는 어느 사형이
"절집에 들어와 3년 안에 꿈 속에서 자신의 머리 깎은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빨리 보는 것" 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그냥 그런 소리려니' 하는 생각에 귓전에 흘리고 말았다.
그런데 삭발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머리를 빡빡 깎고 승복을 입은 내 모습을 꿈 속에서 생생히 봤다.
잠을 깨고는 그 사형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나는 중 될 인연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
나도 모르게 흐뭇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째서 화두는, 참선정진은 이렇게 익히기가 힘드는가.
꿈속에서도 영화가 끊어졌으면 일상에서도 화두가 머리 속을 꽉 채워야 할 텐데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뾰족한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큰스님께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는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수시로 공부의 성과를 점검하려는듯 '화두 잘 되나' 라고 질문하시던 성철스님이 보시기에도 딱했던가 보다.
"너무 억지로 공부하려들면 상기병(上氣病.기가 위로 쏠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픈 병) 이 생겨,
그래 되면 정말 공부를 못하게 되니까 차근차근 해라. "
성격 급한 큰스님이 매사에 느린 나에게 오히려 "차근차근 공부하라" 고 당부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는 상기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큰스님의 말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직 화두 공부가 잘 안되는 것만 억울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