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나들이는 주로 가야산을 오르내리는 것이었는데
어느날엔가 특별한 행차를 한 적이 있다.
행선지는 백련암에서 바로 보이는 마을이다.
마장(馬場) 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다.
마을 이름은 해인사만큼이나 오래된 유래를 지니고 있다.
가야산 자락의 구전에 따르면
1천2백여년 전 신라 애장왕이 해인사를 창건할 당시 수시로 가야산을 찾았다고 한다.
해인사 큰절에서 가까운 암자인 원당암이 있는 자리에
아예 터를 잡고 그 곳에서 정사를 보며 해인사 창건을 독려했다.
마장이란 당시 말을 키우고 먹이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저 동네 사람들은 우째 사는고 내 한번 가봐야겠다. "
성철스님이 어느날 갑자기 바깥 나들이 준비를 지시했다.
나는 다른 일로 가지 못하고 다른 몇분 스님이 큰스님을 따라 나섰다.
백련암에서 마장까지는 6~7㎞나 되는 거리다.
백련암에서 신부락까지 2㎞ 남짓한 거리는 내리막이지만
거기서부터 마장까지 4~5㎞는 서서히 굽어 도는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기에
그렇게 쉽게 다녀올 길은 아니다.
큰스님은 점심공양 후 출발해 저녁 해거름 다되어 돌아왔다.
절에 도착하자마자 목이 타는지 샘물을 한 바가지 떠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곤 "어, 시원하다" 며 별 말 없이 방에 들어 쉬었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서 큰스님이 제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좌선실로 내려왔다.
"내 오늘 마장 갔다온 얘기 할 테니 잘 들어보거래이. "
무슨 말씀인가 싶어 다들 귀를 모았다.
"맨날 건너다 보면서 저곳은 어찌 사는고 참 궁금했는데 오늘 가보니 지지리도 못살데.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고 애새끼들도 올망졸망하고........
그래 가서 보니 참 딱하데. 뭐 우째 도와줄 수가 있을 낀데.......... "
좀처럼 그런 말을 잘 안하던 큰스님이 그 날은 몹시 가슴 아파 하셨다.
결국 다음날 맏상좌인 천제스님이 큰스님께 불려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다.
누구 시주할 사람 없는가 찾아봐라.
개개인에게 돈 줄 수도 없을 끼고 마을 공동으로 재산을 불릴 수 있도록
송아지 몇마리쯤 보시하면 안되겠나?"
시주물을 피하고 세속과 떨어져 살고자 하는 성철스님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다.
천제스님은 평소 큰스님을 존경하는 몇 신도들을 방문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천일여객이란 버스회사를 운영하던 분께 부탁해서 송아지 열마리를 마장에 기증할 수 있었다.
큰스님은 그후 보시한 그 처사를 볼 때마다 "보시처럼 좋은 인연과 공덕을 맺는 것이 어디 있겠노?
아주 훌륭한 불공을 했어" 라며 고마워했다.
그 뿐만 아니다.
큰스님의 마음을 읽은 우리는 명절이 되면 내복을 마장에 갖다 주었다.
승복이야 나눠 입을 수 없었지만 내복이야 승속이 따로 없는 까닭에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가능한 한 성한 내복을 골랐다.
깨끗하게 빨아 매년 한두번씩 갖다주면 동네 사람들이 여간 고마워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까지의 얘기다.
그렇게 열심히 옷을 나눠입기를 몇 년
어느 해엔가 옷을 가져갔더니 마을 대표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제 우리 마을도 살기가 좀 나아져 헌 내복 안 얻어입어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만 수고하시소. "
'좀 살게 되었다' 는 얘기에 한편으론 기쁘고
또다른 한편으론 헌 옷가지를 퇴짜맞았다 생각하니 무안한 마음이 들었다.
빨고 다려서 가져온 것을 그냥 들고 갈 수는 없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이것까지만은 받아주십시오. "
다음해부터는 신도들이 스님들 입으라고 가져오는 내복이 있으면
상표도 뜯지 않고 새 것으로만 차곡차곡 따로 쌓아두었다.
그리고 명절이 되면 마장에 갖다주었다.
그것도 불과 몇년을 계속하지 못했다.
"스님, 큰스님께 가서 말씀 올려주시소.
우리 마을도 이제 좀 살게 되어서 백련암에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더.
정말 그동안 백련암 큰스님과 스님들에게 감사드립니더. "
새 내복도 이제 마다하니 우리로서는 더 어쩔 수가 없었다.
고랭지 채소 재배붐이 일면서 마장의 살림이 급속히 풀려갔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큰스님께 보고했다.
"그래 잘 살면 됐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