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삶의근원

敎當 2017. 3. 29. 10:42

삶의 근원에 대해서 길을 구하던 청년시절 머리 긴 속인으로 화두참선을 시작하다

 

스님은 그 길로 바로 대원사로 갑니다.

영원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구하려고 집을 떠나 깊은 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대원사 주지 스님의 배려로 그 곳에서 작은방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영원의 문제를 풀기 위한 참선 길에 들어갔습니다.

스님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사람들이 가고 오는 것도 모른 채, 밤낮으로 정진하였습니다.

 

그 때는 지리산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친다고 하여 밤만 되면 모두들 방문 밖으로 나가 지 못했지.

나도 호랑이 밥이 될까 무서워 밤에는 방을 나서지 못했어.

그런데 하루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호랑이를 겁내서 떨고 있는 내 꼴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때는 먹히더라도 겁내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그 뒤부터는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잤어.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지나도 아무 일이 없었거든.

그 다음부터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어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다녔어.

 

스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한 번 결심하면 번복하거나 도중에 멈추는 일 없이 그대로 실행하거니와,

그런 태산 같은 의지로 정진하여 삼매에 드니

대원사의 다른 스님들이 오히려 혀를 내두르며 속인인 스님을 어려워 할 정도였습니다.

성철스님은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 이른바 무(無)자 화두를 가지고 참선에 정진하였습니다. 

스님 말씀으로는 그 때에 정진에 든지

 "사십이일만에 마음이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고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가야산 해인사 동산스님에게로 출가하다

 

한 속인이 이렇듯 훌륭하게 정진하고 있다는 소문은 곧 대원사의 본사인 해인사로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1936년 초겨울에 성철스님은 김법린, 최범술 같은 해인사 큰스님들의 권유로 해인사로 갑니다.

그 무렵 해인사에는 당대의 선지식인 동산 스님이 백련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을 본 동산스님은 곧 큰그릇임을 알아차리고, 퇴설당에 자리를 마련해 주며 출가를 권하였습니다.

성철스님은 처음에는 참선만 잘 하면 그뿐이지 승려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도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형식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결젯날 동산스님의 법문은 성철스님의 마음 자리에 운명의 싹을 틔어 놓았습니다.

 

여기 길이 있다.

아무도 그 비결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대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그러나 그 길에는 문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길 자체도 없다.

 

성철스님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여 1937년 정축년 3월에 동산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습니다.

<이영주>라는 속인의 옷을 벗고 <성철>이라는 법명으로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수행의 길에 든 것입니다.

이 때에 스님은 이런 출가시를 남깁니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彌天大業紅爐雪)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跨海雄基赫日露)

그 누가 잠깐의 꿈 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誰人甘死片時夢)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超然獨步萬古眞)

 

 

그리하여 성철 큰스님은 용성, 동산, 성철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계의 큰 산맥을 잇게 됩니다.

그 무렵 한국 불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승풍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피폐해진 이 땅의 불교 속에 참선으로써 진리의 문을 열리라는 서원을 세우고서,

여러 이름난 선원을 다니며 화두 삼매의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동산스님을 따라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한철을 난 성철스님은

같은 범어사 산내 암자인 내원암으로 가서 용성스님을 시봉 하였습니다.

 

그 무렵 용성 큰스님께서는 어떤 스님을 보아도 스님이라 하지 않고 "선생, 선생"하고 불렀는데

성철스님에게만은 웬일인지 "성철스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철스님이 그 까닭을 여쭈니

"다른 중들은 스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어. 그런데 너를 대하니 스님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 어..." 하였습니다.

용성 큰스님은 그렇듯이 성철스님을 미더워하여 서울로 옮겨갈 때에도 성철스님을 시봉으로 데려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대답은 "" 해 놓고 큰스님을 부산역까지만 모셔 드리고는 그 길로 줄행랑을 칩니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공부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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