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고봉스님

敎當 2016. 12. 12. 16:06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그 시절.

안으로는 수행에 몰두하고 밖으로는 나라 찾는 일에 나섰던 고봉경욱(古峰景昱, 1890~1961)스님.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은 고봉스님은 불전(佛典)은 물론 유학(儒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자유자재한 모습으로 길을 밝힌 선지식이다.

 

스무 살은 되었을까.

댕기머리를 한 젊은이가 영축총림 통도사 일주문 앞에서 경내를 살피고 있었다.

1911년 한여름이었다.

청년 유생(儒生)’의 당찬 기운이 느껴지는 젊은이였다.

경내에 들어서니 스님들이 그늘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집 한번 근사하게 지어놓았구나라며 혼잣말을 한 젊은이는 스님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보게, 자네들 가운데 누가 내 머리를 깎아줄 수 없는가?”

스님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 “날씨가 더워서 미쳤나.” “그렇지 않으면 헛소리 할리 없지.”

이날 객기 아닌 객기를 부린 젊은 유생이 고봉스님이다.

 

고봉스님에게 절집 생활은 하나같이 낯설었다.

첫 번째 난관은 발우공양이었다.

눈치껏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물 받는 순간이 됐다.

양이 적당하게 되면 발우를 흔들어야 하는데 규칙을 알 리 없었다.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한 스님이 물을 멈추지 않고 따랐다.

금세 발우에 물이 가득 찼다.

참다못한 고봉스님이 큰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물이 넘치잖아.” 대중들이 박장대소했고, 고봉스님의 얼굴은 붉어졌다.

 

양산 통도사와 상주 남장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면서 고봉스님은 하심(下心) 공부를 했다.

출가자로 거듭나는 과정이었다.

이때 고봉스님에게 영향을 끼친 스승이 혜봉스님과 일하(一河)스님이었다.

고봉스님을 불러 앉힌 일하스님이 발심한 사람은 나쁜 생각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면서

 계율을 지키고, 불조(佛祖)의 말씀에 의지하라. 망령된 말을 따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행자생활을 한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은사는 머리를 깎아 주지 않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참선하는 일이 계속될 뿐이었다.

입산 전에 10여 년간 한학을 공부했기에 불교 경전을 탐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막힘없이 경전을 읽으며 교학을 깊이 공부했지만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창호지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았다.

삭발 못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되뇌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경허스님의 일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글을 읽는 순간 경허스님을 만난 듯 환희심이 일었다.

유생에서 행자로, 다시 진정한 수행자로 거듭난 계기가 됐다.

 

경허스님 일대기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고봉스님은 덕숭산 정혜사를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경허스님의 전법제자 만공스님이 주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반 금봉스님과 정혜사에 도착한 고봉스님은 지대방에서 먹을 갈기 시작했다.

글씨를 쓸 정도의 먹물이 만들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궁금해진 금봉스님이 말을 건넸다. “무엇을 하려고 먹을 가는가?”

고봉스님이 답했다.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요.”

먹물을 갈아 사진을 찍는다니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또 다시 시간이 흘렀다.

먹을 내려놓은 고봉스님이 갑자기 옷을 벗고 온 몸에 먹물을 묻혔다.

그리고 흰 종이에 몸을 던졌다. 물기가 마른 종이를 들고 만공스님을 친견했다.

그림을 살펴본 만공스님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희들이 지금 법()으로 묻느냐. 아니면 장난을 하는 것이냐. 고금(古今)에 이런 법은 없다.”

이날 고봉스님과 금봉스님은 호되게 혼났다.

훗날 두 스님은 “(만공)스님에게 원 없이 맞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났다. 만공스님이 기분이 어떠냐고 했다. “시원합니다라고 답하자,

만공스님은 그렇다. 법은 꾸밈 없는 것이다. 조작된 마음을 갖지 말라며 당신 회상에서 정진하는 것을 허락했다.

 

예전에는 탁발이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궁핍한 절집 살림에 탁발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해 동안거를 앞두고 정혜사 대중이 탁발에 나섰다.

보름뒤 탁발을 마친 스님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고봉스님은 당나귀를 타고 오는 것이었다.

더구나 만공스님에게 나귀 삯을 달라는 것이었다.

 “탁발은 않고 나귀를 타고 와서 삯까지 물어달라니 말이 되는가.”

고봉스님이 답했다. “탁발한 것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왔습니다.

 보름 동안 나가 있었으니 쌀 한 말 정도는 벌어 놓은 셈 아닙니까.

그러니 큰스님께서 당나귀 삯 정도는 물어주셔도 손해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 소리에 만공스님은 크게 웃었다고 한다.

 

<만공어록>에는 고봉스님 관련 글이 두 편 실려 있다.

배고행각(拜告行脚)’끽다헌다(喫茶獻茶)’가 바로 그것.

어느 날 고봉스님이 행각에 나서면서 만공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만공스님은 자네가 이왕 떠날 테면 출산게(出山偈) 하나 지어 놓고 가게라고 말했고,

고봉스님은 두 팔을 흔들며 오늘은 바빠서 지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만공스님은 후일에 또 보겠지. 잘 가게라고 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렇다.

만공스님이 차를 마시다 고봉스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보게! 나는 차 먹네라고 했다.

고봉스님이 말없이 앞에 나아가 차를 한잔 따르고 합장하고 물러났다. 만공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숭산스님이 공주 마곡사에서 행자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고봉스님이 오셨다는 전갈을 받고 한 걸음에 달려갔다.

머리 깎은 지 얼마나 됐느냐?”

몇 달 됐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리 좀 주물러라” “, 스님

다리를 주무르던 숭산스님이 미리 갖고 들어온 목탁을 내 놓으며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했다.

고봉스님은 행자의 당돌한 질문에 아무 말 없이 목탁채로 때렸다.

숭산스님이 답했다. “감사합니다.”

네가 부처님을 보았느냐

아무 것도 못 보았습니다.

왜 목탁을 갖고 왔느냐

숭산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때 고봉스님은 모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모르는 것이고, 아는 것은 분명히 아는 것이니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고 철저하게 참구하라며 공부의 길을 제시했다.

이때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행원(行願)이란 법명을 지어주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고봉스님의 어록

늦가을 저문 해에, 비바람은 몰아치는데,

죽장지고 가는 몸 걸음마다 쓸쓸해라

강호에 일 없는 몸이, 봉래에 와서 보니,

찌를 듯한 산 만봉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봉 허리 안고 도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

쌍선봉 가물가물 하고 많은 세월 속에,

서늘한 사성골에 시름 씻고 누웠어라,

사람 경계 다 잊으니, 밝은 달만 영원쿠나.

 

불교는 바른 깨달음을 통해서 3() 4()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삼보는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이다.

4중은 국가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시주의 은혜이다.

나라 없이 살 수 없으며, 부모 없이 태어날 수 없으며,

스승 없이 바른 법을 배울 수 없고, 중생 없이 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히 깨달음을 얻어 법계의 중생들을 깨닫게 해야

34중의 은혜를 갚게 될 것이다.

 

강바람은 만고(萬古)에 나부끼고,

() 달은 천추(千秋)에 빛나네,

만고의 천추객이 몇 번이나 풍월루(風月樓)에 올랐던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죽으면 슬퍼하니,

이것은 모두 뜬 구름,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리.

 

오는 것도 즐거워 말고 가는 것도 서운하게 생각 말라.

울고 싶으면 실컷 울고, 웃고 싶으면 실컷 웃어라.

성주괴공 희로애락에 흥망성쇠를 분명히 보면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니라.

 

행장

1890929일 대구시 지동(池洞)에서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스님의 선친은 틈만 나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관풍루(觀風樓)와 망향루(望鄕樓)에 나갔다고 한다.

또한 대구향교와 대구시 중구 동산동에 있는 구암서원(龜巖書院)을 찾아 글공부에 전념할 것을 당부했다.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 것이 여섯 살 무렵.

이때부터 부모님의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공부에 집중했다.

10여 년간 한학을 두루 공부했지만 더 이상 이어갈 수는 없었다.

가세는 기울었고, 나라마저 외세에 굴복하여 청년 유생의 웅지(雄志)를 펴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더구나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마음의 상처가 깊어졌다.

고민 끝에 출가사문이 됐다. 이때가 1911년 한여름으로 21세였다.

 

통도사와 상주 남장사에서 행자생활을 한 스님은 경허스님 일대기를 접하고 대자유인으로 살겠다는 원을 세웠다.

만공스님이 주석하는 정혜사로 옮겨 참선수행에 집중했다.

하지만 출가자 이전에 청년으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당시 스님은 삼계가 화택(火宅) 속에 번뇌하는데 나만 홀로 이렇게 극락생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만 홀로 산중에서 열반락(涅槃樂)을 즐기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때가 29세인 1919년이었다.

같은 해 330일 동화사 지방학림의 학인들과 대구 남문 근처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일로 마산교도소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출옥 후 양산 내원사에 머물며 혜월(慧月)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1922년 만공스님에게 전법입실(傳法入室)한 후 정혜사, 백운사, 서봉사 조실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마곡사 은적암에서 선회(禪會)를 열었다.

1956년 이후에는 아산 봉곡사, 대전 복전암, 서울 미타사 조실을 지내며 후학을 지도했다.

고봉스님은 1961819일 제자들을 찾았다.

육신을 벗어야할 시기가 됐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때 스님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며 원적을 맞이했다.

세수 72, 법납 51.

스님은 생전에 사리를 거둘 생각은 하지 말고, 열심히 참선하고 정진하는 부처님 제자가 되라는 당부를 남겼다.

세계에 한국불교의 꽃을 활짝 피운 숭산스님이 고봉스님의 유일한 출가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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