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감옥 계시는데 어찌 더운방을 쓰랴!
대자유인으로 걸림없는 삶을 살다 가신 큰스님들이 많고 많지만,
그 가운데 1900년대를 마음대로 활보하며 호호탕탕 걸림 없는 무애행(蕪碍行)을 보여준
춘성(春城) 스님의 이야기는 오늘에도 한국불교계에 설화(說話)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춘성 스님은 1891년 3월 31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통리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고향인 설악산 백담사에서 한용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하였고
안변 석왕사, 금강산 유점사, 덕숭산 정해사, 도봉산 망월사 등지에서 수행한 뒤
1977년 7월 8일 서울 봉국사에서 열반에 드시어 세수는 87이요, 법랍은 74세였다.
속성은 평창 이 씨였고 속명은 창림(昌林)이었는데
법명도 춘성(春成)이요, 법호 또한 춘성(春城)으로 한문 글자 하나만 달랐다.
춘성은 스승이신 만해 한용운 스님이 기미년 독립선언서에 백용성 스님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서명,
33인 중의 한분으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자 지극정성으로 스승의 옥바라지를 했다.
춘성은 스승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엄동설한에도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않은 채 냉방에서 견디고 있었다.
이때 그 절에 찾아왔던 다른 스님이 돌아보니 절에는 땔감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불을 때지 않은 채 냉방에서 자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해서 춘성에게 물었다.
“아니 저렇게 땔감이 많이 있거늘 어찌하여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않고 냉방에서 덜덜 떨면서 자는게요?”
“그야 물론 장작이야 넉넉히 있지요.
허나, 스승께서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한테 붙잡혀 지금 서대문 형무소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실 것인데,
그 제자인 내가 감히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나오시기 전에는 결코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겨우내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았다.
그만큼 춘성은 스승 만해 한용운 스님을 공경하는데 절대적인 효성을 다 바치고 있었다.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
춘성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거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스님도 춘성을 제자로 늘 자랑했고,
춘성 또한 만해 스님의 제자임을 당당히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만해 한용운 스님이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지내던 겨울 어느날.
제자인 춘성이 추위에 고생하시는 은사 만해 스님을 위해 두툼한 솜바지저고리 한 벌을 지어가지고 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내복도 없던 시절, 홑옷만을 입으신 채 형무소 바닥에서 엄동설한에 고생하실 스승을 염려한 나머지
제자 춘성이 정성을 기울여 만들어온 솜바지저고리였다.
제자가 만들어온 새 솜바지저고리를 넣어드리자 만해 스님이 제자에게 물었다.
“이것 보아라. 이 솜바지저고리를 만들라면 수월찮은 돈이 있어야 할텐데.
그대가 도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이 비싼 솜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왔는가?”
“스님, 그런건 염려마시고 따뜻하게 입으시기나 하십시오.”
“무슨 돈으로 만들었냐고 물었다. 대체 무슨 돈으로 이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어 왔느냐?”
“사실은… 달리 돈을 마련할 길이 없기에 절에 딸린 텃밭을 팔아
그 돈으로 이 솜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걱정 말고 입으십시오.”
“너 이놈! 절에 딸린 텃밭은 부처님 재산이거늘, 그걸 감히 네 마음대로 팔았단 말이더냐?”
“텃밭은 나중에 다시 사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될 소리! 너는 부처님 재산인 사중 땅을 사사롭게 쓰기 위해 함부로 팔아먹었으니 죄 중에도 큰 죄를 지었다.
나는 너 같은 상좌를 둔 적이 없으니 오늘부터 당장 내 제자라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도 말라!”
만해 스님은 이렇게 매섭게 제자를 꾸짖고 정성들여 만들어온 솜바지저고리 받기를 거절했다.
그날 이후 춘성 스님은 은사 없는 스님이 되었다.
그전에 누가 “어느 스님 제자냐”고 물으면 두말없이
“만자, 해자 스님이 제 은사입니다”했던 춘성이었지만
솜옷 사건으로 “너 같은 상자 둔적이 없다”는 꾸짖음을 들은 뒤로는 감히 만해 스님의 제자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던 것.
그 후로는 누가 물어도 춘성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은사가 안계십니다.”
참으로 스승다운 스승 노릇하기도 어렵고 제자다운 제자 노릇 하기도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그 스승과 그 제자가 보여준 셈.
평생 한벌옷에 밥그릇 하나
칼날 같은 은사 만해 한용운 스님께 혹독하게 당한 덕분이었을까.
춘성 스님은 도무지 아무것에도 욕심이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이 찢어지고 닳아져서 다른 스님이 보다 못해 승복을 한 벌 갖다 주면 그 자리에서 즉시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헌옷은 바로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새옷을 입고 헌옷을 가지고 있으면 두벌 옷을 갖고 있는 셈이 되겠는데,
춘성은 못입게 된 헌옷을 미련 없이 태워버려 두벌 옷을 가져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일의일발(一衣一鉢)의 인생을 사신 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춘성은 후학들이 담요를 덮고 자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행자가 너무 안락하고 따뜻한 잠자리를 바래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오는 신도들은 사치스런 옷차림으로 절에 왔다가는 춘성 스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당하기 일쑤였다.
분에 넘치는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절에 오는 여자가 있으면 스님은 사정없이 호통을 쳤다.
“야 이 미친것들아, 옷 자랑하려면 번화가로 갈 것이지 뭣하러 절에 왔어?”
걸죽한 욕설 속에 번뜩이는 禪旨
춘성 스님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님이 아니었고 큰 감투를 별로 쓴 일이 없었기에 매스컴에 자주 소개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197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욕쟁이 스님’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춘성 스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걸죽한 욕설을 무차별로 쏟아내는 스님이었다.
지나치게 화장을 하고 사치스런 옷을 걸친 채 으시대기 좋아하는 여자가 절에 오면
춘성 스님은 아무리 지체가 높은 고관대작의 부인이라고 하더라도 즉석에서 “씨부랄 년!” 이라는 욕부터 쏟아냈고,
값비싼 털옷을 입고 온 여자의 털옷을 벗게 한 뒤 그 자리에서 태워버린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걸림없이 쏟아내는 춘성 스님의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어도
누구 한사람 감히 항의하거나 대들지 못한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참 이상하게도 춘성 스님의 욕설에서는 천박한 냄새가 나는게 아니라 상큼하고 속시원한 지혜가 번뜩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걸죽하고 질퍽한 춘성 스님의 육두문자와 욕설 속에 선지(禪旨)가 담겨있었던 탓이 아닌가 싶다.
내 본적은 아버지 현두(賢頭)
한국전쟁 직후의 일이었다.
춘성 스님은 서울 도봉산 망월사(望月寺)를 혼자 지키고 있었는데
절이 퇴락할대로 퇴락하여 보수공사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동란을 겪고 난 직후라 너나없이 살림이 곤궁했던 터에 당시만 해도
첩첩산중 망월사에 불공 올리러 오는 신도들도 별로 없었으니 절 살림이 넉넉했을 리 없었다.
춘성 스님은 생각다 못해 손수 나무를 베어다가 절을 중수하려고 벌목을 했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나무 몇 그루 베어와 놓은게 의정부 영림서 직원에게 적발되었다.
이때만 해도 허가 없이 나무를 베는 행위는 살림법 위반으로 가차 없이 잡아다가 ‘콩밥’을 먹이던 시절이었다.
이 무렵 농촌에서 백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첫째가 순사요,
둘째는 밀주단속을 하는 세무서원 그리고 셋째는 사람을 마음대로 잡아갈 수 있는 산림계 직원이었다.
당시 산림계 직원이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농촌 백성은 모두가 다 단속대상이었다.
그만큼 땔나무를 산에서 얻어와야 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대부분의 농민이 산림법을 위반하고 있었는데,
더더구나 땔나무감이 아니라 집 고칠 목재용 나무를 허가 없이 벌목했으면
이건 그야말로 걸려도 크게 걸리는 산림법 위반이었다.
춘성 스님은 의정부 영림서(營林署)의 서슬 시퍼런 호출을 받고 영림서에 출두했다.
영림서 서장이 조서를 작성하기 위해 춘성 스님에게 물었다.
“본적이 어디 입니까?”
“내 본적이야 우리 아버지 현두(賢頭)이지.”
이 말은 들은 영림서 서장이 하도 기가막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시 물었다.
“그것 말고 스님의 고향이 어디냔 말입니다.”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요.”
영림서장은 하도 기가막혀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었다.
“아. 아. 알았으니 어서 그만 나가시오! 이 늙은 중아!”
이렇게 해서 영락없이 쇠고랑을 찰 줄 알았던 춘성 스님은 산림법을 위반하고도 그날로 석방되었다.
무엇이 죽었다 살아났다고?
춘성 스님이 서울 불광동 녹번리에 있는 어느 절에 갔다가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를 탔다.
그런대 그때나 지금이나 서양종교를 선교한답시고 버스에 올라 떠들어대는 광신자가 있었다.
이날 춘성 스님이 타고 있던 버스에 서양종교의 광신자가 판자에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써 붙이고 올라오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갑니다!”
그런데 이 광신자가 일부러 승복을 입고 있는 춘성 스님 앞으로 와서 더욱 큰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자 춘성 스님이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에이끼 놈!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남자의 ××밖에 없어 이놈아!”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일시에 박장대소를 했다.
그 광신도는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어쩔 줄을 모르며 버스에서 내렸다.
항아리에 냉수 채우고 정진
춘성 스님은 이렇듯 못마땅한 일을 보거나 겪으면 주저없이 즉석에서 육두문자로 대성일갈 호통을 내렸다.
그러나 춘성 스님은 늘 이렇게 막가는 분은 결코 아니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스님은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위해 비장한 결심을 했다.
스님은 법당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그 자리에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엄동설한 자칫하면 항아리에 가득 찬 냉수가 얼어 항아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춘성 스님은 참선수행을 하다가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 찬물 담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서
머리만 내밀고 앉아 정진을 했다.
발가벗고 항아리 속에 들어 앉아 참선하면서 춘성 스님은 쾌재를 불렀다.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수행자로서 춘성 스님은 참으로 무서운 분이었고 서릿발 같은 분이었다.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 수행을 할적에 젊은 수좌들이 담요를 덮고
자다가 춘성 스님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수행자가 편하고 따뜻한 잠을 자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야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이리 내놓아라!”
춘성 스님은 기어이 젊은 수좌로부터 담요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토록 수행에 철저했던 분이 바로 춘성이었는데 서울 근교 어느 비구니 사찰 중창불사를 위한 법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법문을 남기기도 했다.
“시집 장가가는 데는 ××와 ××가 제일이듯.
중창불사 하는 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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