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도일(馬祖道一)의 선사상(禪思想)의 뿌리는
보리 달마(菩提達磨)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류(源流)를 찾아볼 수 있다.
보리 달마 존자는 원래 남인도 지방 사람으로 향지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으며,
성(姓)은 찰리제(刹利帝), 본명은 보리다나(菩提多那)이다.
석가모니불 이후 법맥을 이은 33조사(祖師) 가운데 28조(祖)에 해당된다.
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를 따라 출가하였다.
달마는 이 반야다라존자에 의해 보리달마란 이름을 받았다.
‘달마(達磨)’란‘크게 통했다’는 의미다.
하루는 보리 달마가 스승에게 다른 지방으로 가서 법을 전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으나,
스승은 “네가 비록 법을 얻었다고는 하나, 아직 때가 아니므로 내가 입적하고 67년이 지난 후 중국으로 가라.
그곳에서 교화하는 동안 깨달아 도를 얻는 사람이 수를 셀 수 없을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 남방이 아닌 북방으로 가도록 권유했다.
달마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스승을 40여년 정성껏 시봉하였고,
반야다라 입적 후에도 교화에 힘쓰면서 때를 기다렸다.
당시에 반야다라의 제자인 비구 불대선이라는 승이 있어,
두 사람은 형제처럼 지내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이감로문(二甘露門)’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비구 불대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종(六宗)으로 나뉘어 문도들이 제각각 교화의 문을 펼치므로,
달마는 이 육종을 각각 타파하여 바로 부처의 본지(本旨)에 들게 하여 온 나라에 교화를 펼쳤다.
스승의 명대로 67년이 지나자,
중국으로 가기 위해 스승의 탑을 참배하고 국왕과 대중에게 고별했다.
국왕은 큰배를 준비하고 해안에서 친히 달마를 전송하였고, 대중들은 눈물로 작별했다.
그리하여 달마는 드디어 배를 타고 동쪽으로가 중국의 남해 광주(廣州)에 도착했다.
달마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스승을 40여 년 동안 모셨고,
스승이 입적한 후에도 67년을 기다렸으니,
중국으로 건너갈 때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20~130세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노구(老軀)를 이끌고 중국을 교화하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난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은 광주였으며,
때는 양 무제(梁武帝) 보통(普通) 8년(서기 526)이었다.
이 당시의 중국은 서진(西秦) 말기의 대란을 거치면서 북방에서 생산력이 앞선 많은 한인(漢人)들이 남으로 이주하였고,
남쪽 지방은 비교적 전화(戰禍)가 없이 평온하였으므로,
북쪽 한인들의 기술과 사회적 안정이 결합되어 장강 유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맞았고,
이에 따라 불교 또한 발전하여 전국적으로 2천 8백여 사원이 건립되었고,
승려의 수만도 8만 2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황실에서 민간의 여인네에 이르기 까지 폭넓게 불교를 숭상하였고,
불경의 번역을 비롯하여 시, 서, 회화 조상, 건축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준에 이르도록 융창했던 시기였다.
양무제는 특히 불교에 심취하여 ‘불심 천자(佛心天子)’로 불리만큼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양 무제는 달마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금릉궁으로 초빙하여 가르침을 청했다.
이 때 달마와 양무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화를 나눈다.
(朕卽位已來 造寺寫經度僧 不可勝數 有何功德)
“짐이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사원을 세우고, 많은 불경을 번역하고 쓰게 했으며,
많은 승려들에게 도첩을 내렸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많습니까?”
(竝無功德)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답에 양 무제는 깜짝 놀라면서 다시 물었다.
(何以無功德)
“아니! 어째서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까?”
(此但人天小果有漏之因 如影隨形 雖有非實)
“이는 단지 유루(有漏)의 인(因)에 의한 조그마한 과(果)에 불과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물체에 따르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공덕이 있다고는 하나, 실다운 것이 아닙니다.”
(如何是眞功德)
“그렇다면 어떠한 것이 참다운 공덕입니까?”
(淨智妙圓 体自空寂 如是功德 不以世求)
“정(淨)한 지혜는 묘하며 원만하고 체(体)는 스스로 공적(空寂)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인연이 아님을 알고,
달마는 북으로 걸음을 옮겨 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도착하여 말없이 9년 면벽(面壁)에 들어간다.
후에 양 무제는 이 일을 지공(誌公) 스님에게 물었다.
지공은 “달마는 관음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는 큰스님”이라는 말을 듣고
뒤늦게 크게 후회하며 사신을 보내 모셔오겠다고 하자, 지공은 달마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며 만류했다.
양무제는 후에 달마를 추모하는 비를 세우면서 비문을 지어 그 때 달마를 몰라본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눈으로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見之不見),
몸으로 만나고서도 만나지를 못했구나(逢之不逢)!
예나 지금이나(古之今之)
후회하고 또 후회할 뿐이로다(悔之恨之)!
달마는 후위(後魏) 효명제(孝明帝) 때에 숭산(崇山) 소림사에 도착하여,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만 바라보고 앉아 9년을 하루 같이 좌선만 하였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달마를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고 불렀다.
달마는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돌아가 정신을 집중하여 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지고 범부와 성인이 동등하게 된다.
굳게 머물러 옮기지 아니하고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며
도와 더불어 합치하니 고요하여 인위적으로 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을 이른바‘참선 타좌(參禪打坐)’라고 한다.
즉 달마가 벽만 바라보고 앉은 것은 진정한 선에 들기 위한 법을 보인 것이지,
그냥 길게 오래 참고 앉아 있는 좌(坐)만 보인 것이 아니다.
달마가 중국으로 온 시기의 중국 불교는 이제 막 경전의 번역 시대에서 연구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교리에 대한 연구와 경론(經論)은 발달했으나,
정작 생사를 해탈하고 진정한 나를 찾아 부처를 이루는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했다.
그래서 달마는 이 시대의 폐단을 타파하기 위해
“곧바로 마음을 관조하여 본래의 성품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여,
경을 해석하고 논쟁을 일삼는 것은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는 것이라는 것을 설파했다.
문자를 가지고 해석이나 논쟁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불의 참다운 뜻을 제대로 간파하라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대명제를 천명한 것이다.
소림사에서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달마는
도로 인도로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제자들을 모아 놓고 그동안 각자 마음으로 얻은 바를 말해보라고 했다.
제자 도부(道副)가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법은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또한 문자를 벗어나지도 않는 것으로써 도를 삼는 것입니다.”
“너는 내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摠持)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보았을 때, 한번 보고는 다시 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내 살을 얻었다.”
이번에는 제자 도육(道育)은 이렇게 답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두 공하며,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오온(五蘊)이 모두 있지 아니합니다. 대천세계 또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너는 내 뼈를 얻었다.”
끝으로 혜가(慧可)는 일어나서 조사에게 나아가 예배하고는 도로 제 자리로 돌아가 아무 말도 없이 서있었다.
“너는 내 골수를 얻었다.”
이어서 달마는 혜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처께서 가섭 존자에게 전한 정법이 돌고 돌아 내게로 전해졌다.
지금 네게 전하니 잘 지키도록 하라 법을 전하는 가사(袈裟)를 줄 터이니, 법신(法身)으로 삼도록 하여라.”
그러면서 게(偈)를 읊었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吾本來玆土),
법을 전해 미혹한 중생을 구하기 위함이었노라(傳敎救迷情).
꽃송이 하나에 꽃잎이 다섯이니(一花開五葉),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리라(結果自然成).
이 말을 마치고 단정히 앉아 입적하니, 이때가 후위(後魏) 효 명제 대화(大和) 19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