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立秋)가 지나니 저녁과 아침 바람끝이 제법 차다.
세상의 번잡한 세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은 자기자리를 내주기 싫어 천둥번개를 치며 몸부림을 친다.
일지암(一枝庵)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초의 스님의 숨결이 실려 있는 일지암의 작은 차밭에는 벌써 가을준비로 수런거리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우주의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거대한 진리를
우리는 찰나지간에 느낄 뿐만 아니라 긴 인생의 전환점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잔의 차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초의 스님이 말씀하셨던 동다(東茶) 즉 우리 차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큰절인 해남 대흥사에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새벽숲길 수련회’를 실시한다.
평상시 수련회 일정에 일지암을 찾아서 차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도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련회 마지막 날인 일요일 아침 일찍 수련생들이 자우 홍련사 툇마루에 앉았다.
차 한잔을 공손히 손에 들고 맑은 얼굴을 한 수련생들은 차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간단한 강의가 끝나자 한 수련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스님 우리 차가 좋습니까, 중국 차가 좋습니까. 요즘 턱없는 소문이 떠도는 푸얼차는 도대체 어떤 차입니까.”
차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받고 있음에도
‘아직도 우리의 차 문화는 대중들에게 너무도 멀리 있구나.’하는 당혹감이 스며들었다.
먼저 푸얼차에 대해 답을 했다.
“푸얼차는 중국인들조차 야만인들과 유목민들이나 먹었던 흑차, 흔히 오랑캐 차로 부르기도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보내준 몽정차와 육안차를 직접 마셨던 초의 스님은 동다송(東茶頌)에서
“육안차는 맛, 몽정차는 약효가 있다는데, 우리 차는 그 두 가지를 다 겸했다고 옛 사람들은 높이 평했다.”고 우리 차를 극찬했다. 우리차는 색(色), 향(香), 미(美), 기(氣) 측면에서,
또한 요즘 현대인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웰빙 측면에서 이 세상 그 어느 차보다 ‘좋은 차’라고 먼저 못 박고 싶다.
▲ 해남 대흥사 일지암.초의스님이 40세부터 입적때까지 주석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노작 ‘동다송’을 펴냈던 차의 성지로,지금의 건물은 1979년 복원된 것이다.<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우리가 가장 흔하게 마시고 있는 포도주의 예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매우 귀하고 맛있는 포도주’에 대해 그냥 오래되면 좋은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많이 다르다.
좋은 포도주는 기온의 변화가 심하고 가뭄과 추운 겨울 등 자연의 악조건 속에서
힘들게 자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가 당도도 높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지금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랑스의 보졸레누보가 대표적인 경우다.
인기없는 포도 중 하나였던 보졸레누보는 자갈밭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했다.
척박한 땅이란 악조건 속에서 보졸레누보 포도나무는 땅속깊이 뿌리를 내렸고
그것이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포도로 재탄생한 것이다.
차 나무도 마찬가지다.
사계절의 변화가 혹독한 조건에서 자란 차나무의 잎이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그런 점에서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는 좋은 찻잎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은 우리나라 군산과 목포의 위도에 해당하는 산둥성등 몇군데를 제외하곤
우리나라 제주도 이남지역에 해당할 정도의 따뜻한 아열대 날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토심(土心)이 매우 부족해 찻잎의 맛과 질이 떨어진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시즈오카 등 몇몇 지방을 제외하곤 온도의 차가 매우 적어 좋은 찻잎을 수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하나 우리 찻잎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어느 나라보다 토심이 좋다는 것이다.
차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려 좋은 찻잎을 생산할 수 있는 좋은 땅의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당연히 우리의 차는 맛과 영양 그리고 약리적인 측면에서
세계 최고의 차가 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우리차의 성전인 ‘동다송´은 일지암에서 초의 스님이
순조의 부마이자 사대부 차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해거도인 홍현주로부터 차를 알고 싶다는 간절한 물음을 받고
이에 대한 답으로 52세(1837년)때 편찬됐다.
홍현주는 우리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추사 김정희 정약용 등과 깊은 교류를 가졌던 초의 스님은 당시 순조의 ‘부마’로 ‘실세’였던 홍현주 등
유가의 뛰어난 선비들과 한양을 왕래하며 학문과 차담을 나누었다.
▲ 초의스님 영정.
모두 31구송(句頌)으로 되어 있는 ‘동다송´은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 차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차나무를 직접 심고 따본 경험을 바탕으로 덖고 건조시키는 조다법을 이용,
우리차의 공(功)과 덕(德)을 찬양하고 있다.
초의 스님은 ‘동다송´에서 중국 다서(茶書)에 있는 각종 고사를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상세하게 주석을 달고 있어 육우의 ‘다경´에 필적하는 우리나라의 ‘다경´으로도 손색없을 정도의 노작을 만들어 냈다.
우리에게 현존하는 ‘동다송´은 태평양화학공업주식회사의 다예관에 소장된 필사본인 ‘다예관본(茶藝館本)´,
석오 윤치영의 필사본인 ‘석오본(石梧本)´, 갑술중추 경앙등초라고 쓰여 있는 ‘경암본(鏡菴本)´,
송광사 보정 스님이 필사한 ‘다송자본(茶松子本)´ 등 크게 4가지본이 있다.
‘동다송´을 통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의순(艸衣意恂)선사가
40세(1825년)때 터를 닦고 입적 때까지 주석했던 일지암은 지금 한국 차의 성지로
5.5평의 초당, 그리고 새롭게 단장한 자우홍련사, 법당과 요사채가 전부다.
그러나 앞마당에 펼쳐진 몇백평 규모의 야생차밭을 필두로 서해바다의 낙조를 볼 수 있는 먼 풍광은
유천(乳川)의 물맛과 함께 차의 성지로서 군계일학이다.
조선후기뿐만 아니라 일지암은 우리 현대 차문화사의 명실상부한 중흥조다.
1979년 복원된 일지암은 한국의 차인들을 한곳에 결집(結集)시켰을 뿐만 아니라
초의 스님과 차 문화를 현대인들의 품속으로 되돌려 놓은 기폭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일지암의 이름은 장자(莊子) 남화경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뱁새는 일생동안 한곳에 작은 깃을 틀고 잔다.”는 구절과
한산시(寒山詩)의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는 구절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초의 스님은 일지암에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윤연 홍석주 등과
다도를 논하고 시를 지으면서 ‘동다송´ ‘다신전´을 지었다.
일지암의 흔적은 일지암시집(一枝庵詩集)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 초의스님의 부도(대흥사 소재).
장춘동은 해남 남방 20리 두륜산 일맥, 용과 호랑이 상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산맥은 십구요, 계곡은 구곡이다.
대흥사의 남방이요, 북암에서 볼 때는 서쪽이요, 남암에서 볼 때는 북쪽, 이곳에 초당을 지었으니 이름이 일지암이다.
삼간 초당에는 초의 스님과 동자 한 사람,
법상(法床)에는 금으로 도금된 부처 일좌(一座),
아침저녁의 목탁소리 샘물과 수목이 의지하고 죽림의 바람소리는 가야금소리 같다.
축대를 쌓아 과원(果園)을 만들고 석간(石澗)에서 나오는 물은 죽관으로 받아 차를 끓인다.
남은 물이 고인 곳에 연못을 만들어 연못 위에는 나뭇가지를 얽어 포도넝쿨을 틀어 올리고 정원주변은 수석으로 갖추었다.
그러나 초의 스님 열반 후 일지암은 화재로 소실됐다.
지금의 일지암은 1979년 후대의 차인들의 노력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1976년 여름 해인사 율원에 박태영 화백의 주선으로 박동선씨가 그곳에서 공부하던 필자와 도범 스님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필자와 도범 스님 등 방문자 일행은 토우 김종희 선생댁을 방문,
한국 차문화의 복원과 일지암 복원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렇게 시작된 일지암 복원은 김봉호 박동선 김미희 박종한 김종희 안광석 조자룡씨 등 수백명의 차인 결성으로 이어졌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일지암터 확인이었다.
‘대둔사지´ ‘몽하편병서´ 문헌을 확인하고 대흥사 주지를 역임했던 응송(당시 90세) 스님 을
지게에 업고 다니던 1977년 2월 하순 오늘의 복원터를 확증할 수 있었다.
당시 에밀레 박물관장이자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구조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자룡씨가
새롭게 복원되는 일지암의 설계를 맡았다.
조자룡씨는 한국의 전형적인 다실을 찾기 위해 전국 각처를 답사했다.
결국 한국전통 초당형식을 갖춘 일지암 초당은 5.5평의 정사각형 초가형태로,
법당 겸 요사채는 15.5평의 기와집으로 일지암복원위원회가 결정한 후 1979년 2월 완공했다.
일지암의 복원은 한국현대 선차(禪茶)문화의 복원으로 연결됐다.
그때부터 초의 스님 ‘동다송´ ‘다신전´ 등 차 관련사업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을 뿐만 아니라
초의 스님을 추모하는 초의문화제를 개최하면서 차 문화의 보급이 급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지암복원은 초의 스님이 생존했던 조선후기뿐만 아니라
한국현대 차문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 초의스님이 지리산에서 집필한 다신전.
조선후기 한국차의 중흥조인 초의 스님의 자(子)는 중부(中孚)이며
호는 초의,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우사(芋社), 자우(紫芋), 병발(甁鉢) 등 여러 가지가 있다.
15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벽봉 민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초의 스님은
월출산에서 해가 지고 보름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연담 유일선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며 초의라는 호를 얻었다.
<초의>는 고려말 야운선사의 자경문 가운데 있는 풀뿌리와 나무열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송라와 풀옷으로 몸뚱이를 가린다는 구절에서 유래됐다는 설과,
중국사략 가운데 굴을 파서 즐겨 살며 나무를 얽어매어 집을 삼고 나무 열매 먹고 풀옷을 입는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초의선사는 요즘 현대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멀티플레이어’였다.
영국에서 활약 중인 박지성처럼 어느 포지션에서도 역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실력있는 멀티플레이어’였던 것이다.
먼저 스님으로서 수행의 최고봉인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해 대흥사 13대강맥을 이었다.
초의 스님은 또한 탁월한 금어(金魚:불화를 최고의 경지에서 그리는 스님)이자 선필(禪筆)가였다.
범자(梵字)를 익혀 범어의 뜻을 익혔으며 ,
탱화를 잘 그려 당나라 최고의 탱화장이였던 오도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와 겨룰 정도로 예서체에 뛰어난 경지를 보였다고 한다.
불교전통음악인 범패, 원예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만드는 법 등에도 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하나는 바로 남종화와 초의 스님의 인연이다.
초의 스님이 50세 되던 해인 1835년 봄 진도에서 남종화의 시조(始祖)가 된 소치 허유(小痴 許維)가 찾아온 것이다.
소치는 일지암에 3년을 머물며 초의 스님의 화법과 시학·불경과 차를 배웠다.
초의는 소치의 자질을 알아보고 추사와 인연을 맺어준다.
오늘날 한국화단의 큰 산맥인 남종화가의 탄생이 바로 초의 스님과의 인연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소치는 먼 훗날 초의 스님의 인품을 묻는 헌종에게
세인이 모두 고승이라 하옵는데 그분은 내외전(內外典)에 달통했으며 승속간에 많은 인사와 교유하고 있다고
밝히는 연유가 된다.
또한 그의 자서전인 ‘몽연록´을 통해 초의 스님과 추사의 인연에 대해
“두 스승은 꿈속에서 만난 인연”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초의선사가 최고의 멀티플레이어였다는 것은 당시 조선후기 유교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불교와 거리를 사상적으로 좁혔다는 점이다.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연천 홍석주 등과 같은 당대의 거장들과
유·불·선에 대한 담론을 이뤄냈을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성취해낸 것이다.
초의 스님의 또 하나의 노작(勞作)은 바로 ‘다신전(茶神傳)´이다.
1828년 그의 나이 43세 때 지리산 칠불선원에 머물며 초록(抄錄)해낸 ‘다신전´은
청나라 모환문이 엮은 ‘만보전서´에서 차에 관한 부분인 ‘채다론’(採茶論)을 번역한 것이다.
‘다신전´은 차의 신에 관한 기록으로 찻잎을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꾸며놓았다.
초의선사는 “전에는 승가에 조주풍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져 다도를 알고자 하는 이를 위해 초록해낸 것”이라며
‘다신전´ 편찬의미를 밝히고 있다.
초의 스님을 두고 사람들은 시(詩), 서(書), 화(畵), 차(茶) 4절(絶)이라고도 했다.
그런 점에서 초의 스님은 당대 최고의 ‘신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의 스님은 세속의 명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땅끝 대흥사 일지암이란 오지에 머물면서도 요동치듯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현실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변화를 실천하는 실천가였다.
당대의 신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당대 중생들 삶의 ‘개화’(開化)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초의 스님에게 음풍농월의 수단이 아닌,
전통을 이어가고 새로운 현실의 삶의 변화를 위한 첫걸음 같은 것이었다.
초의 스님이 살던 시대는 참으로 척박했다.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경제는 민중들을 빈곤한 삶으로 몰아댔고,
낡은 시대의 유물들은 쌓여진 지식의 보고들을 갉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중심세력들의 당쟁으로 인해 민중들의 삶이 이리저리 내몰린
조선후기의 초의 스님 시대와 오늘 우리시대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조망할 혜안을 가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중생들의 곱디 고운 삶을 현실속에서 아름답게 보듬어 안고 함께 걸어갈 우리시대의 신 지식인이 그리운 때다
(일지암 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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