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육조단경

육조단경(3)

敎當 2010. 6. 18. 12:43

 

7. 定慧 - 정과 혜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도교인·속인들과 더불어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바요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淨心)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서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랄지니라."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菩提般若)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定惠等).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法)에 두 모양(相)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淨名經)-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直心是道場 直心是淨土)'라고 하였느니라.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가가 아니니라.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坐不動)이 곧은 마음이라고 하며,

망심(妄心)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 것이니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유마힐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리불을 꾸짖었던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라.

선지식들아,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거나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8. 無念 - 생각이 없음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에 깨침(頓)과 점차로 깨침(漸)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見性)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體)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相)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無念)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境界)를 떠나고 법(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귄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러므로 생각 없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無念爲宗).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느니라.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二相)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眞如)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體)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用)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

 

9. 坐禪 - 좌선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坐禪)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眞如)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느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느니라.

 

망상은 처소가 없다(忘無處所).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하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느니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道)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라. .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므로 선정(禪定)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하였고,

<보살계>에 말씀하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自性)이 깨끗하다'고 하였느니라.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지음(自修自作)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스스로 행함(自行)이 부처님의 행위(佛行)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自作自成佛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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