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은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바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문제는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나서 아픈 것도 문제이며
남편의 승진도 문제이며
자녀의 진학도 문제에 해당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마음은
늘 괴롭고 어두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고액은 넘고 넘어야 할 산과 같으며
건너야 할 엄청난 강과 같습니다.
또 고액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뇌리에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 합니다.
그 지혜는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아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이 텅 비어서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괴로움이 아닌 것입니다.
즉 괴로움의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공하다는 인식에서는
일체의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반야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계속되는 상처로 얼룩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공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상처받지 않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지혜의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하고
지혜는 반야이며 반야는 공에 대한 확실한 인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과 정신이 실제로 존재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온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중요 합니다.
반야심경은 그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온의 존재 양상이 바로 개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빈 모양으로 존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결코 없는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데서
행복은 저절로 �아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빈 것으로 보면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지고 거기에 진정한 행복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무수한 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하늘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꽉 차 있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소를 아주 잘 잡는 백정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소문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왕은 어떻게 해서 그가 소를 잘 잡는지 보려고 푸줏간으로 갔습니다.
그 백정은 소를 잡아 살을 뜨고 뼈를 가르는데
마치 곡조에 �추어 춤추듯 하였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의 예술로 승화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왕은 감탄한 나머지 그에게 칼을 멈추게 하고
어떻게 하여 그렇게 잘 가르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처음 백정이 되었을 때는
소가 한덩어리로 보이고 그러다가 마침내 소 한 마리가
살과 뼈로 완전히 분해되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분해된 상태에서
텅빈 공간과 공간 사이를 지나면서
칼 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훈련을 통해 도의 경지에 도달한 백정은
소 한 마리를 볼때 처음부터 텅 빈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물론 이거니와 인생 그 자체도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체의 것이 있다고 하는데서 괴로운 것입니다.
자의식은 말 할 것도 없고
사랑,미움,있다, 없다등 소유의식은 그 연장선상에서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봄이 되면은 잎이 무성하게 피는 듯 보이지만
곧 가을이 되면 하나 둘 잎이 지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문제들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또한 똑같은 이치 입니다.
그 어떤 가르침보다 공의 가르침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최상의 명약이 됩니다.
이상에서 볼때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은
바로 불교의 목적이며 우리 인생의 길잡이인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불교의 진수를 깨닫는 것이며
불교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 나머지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이 구절은 중요 합니다.
결국 반야심경은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육신과 정신세계를 텅 빈 것으로 관조할 때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