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불교경전 이야기

반야심경3

敎當 2008. 7. 21. 10:42
 

오온의 다섯가지 중에서 수·상·행·식의 네가지 정신작용은 아주 미묘해서

정확하게 선을 그을수는 없습니다.

오온에서 색온은 인간의 육신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나머지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은 인간의 정신적인 면에 해당됩니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육체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세분되어 나누는 것입니다

오온을 쉽게 풀이하면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다섯가지 작용 때문에 인간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人間觀)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오온중에서 수·상·행·식의 작용은

복잡하고 연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을 산다고 했을때

먼저 좋다, 나쁘다의 수온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런 상상의 끝에가면 물건을 사게되는데

그것은 행온작용입니다.

이어서 식온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 물건에 대해

관찰하고 어떻게 쓸것인가 하는 등의 구상작용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개공은 ‘텅 비었다’는 뜻으로 풀이 할 수가 있습니다.

공에는 두가지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변성(不變性)과 가변성(可變性)입니다.

불변성은 그대로 진(眞)의 차원이고 가변성은 여(如)의 차원입니다.

예를 들어 꿈을 꾼다고 가정을 했을때 꿈을 깨고나면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은 온데 간데 없고

그대로 이불속에서 편히 누워있는 상태는 진의 차원이고

반대로 꿈속에서 꿈을꾸는 동안 온갖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여의 차원입니다.

오온개공도 두가지 입장에서 고찰해보면

하나는 오온 그 자체가 그대로 공(空)이며 진(眞)이라는 입장입이다.

다시 말해서 오온은 영원불변한 것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오온은 가변적이어서

환영적(幻影的)이며 비실재적(非實在的)인 것이라는 차원입니다.

이것은 여의 입장입니다.

대부분 오온 개공을 가변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에

공에대한 완전한 설명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공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텅빈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것은 더욱 아닌 것입니다.

유와 무를 초월한 존재의 실상이 바로 공입니다.

조견오온개공 즉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비춰본다’는 것은

현상적으로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자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재를 한꺼풀 벗겨놓고 보면

몸과 마음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두각시 인형놀음을 보고 있으면

온갖 희노애락이 그속에 다 담겨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장막을 걷어버리면 인형들의 희노애락은

한낱 손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모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은 그대로 텅빈 것인데도 불구하고

집착과 아집에 가려 인형들의 놀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움에 가득 차있다고 해도

몸과 마음이 텅빈 것이라고 한다면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게 될 때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닌것입니다.

존재의 실체를 텅 빈 것으로 바로 아는 것이 곧 반야입니다.

근본이 텅 빈 것이라고 해서 허무하거나 무상한 것이 아닙니다.

텅 비었다는 것은 무한히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 비었을 뿐만 아니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의 실상 또한 텅 빈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시해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감정이 그 현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정이 영원한 것인양 착각하여

탐·진·치 삼독(三毒)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입니다.

흔히 자존심을 건드려서 감정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자존심이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자존심이 마치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것이 습관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삼독심으로 가득차 있어서

다른 어떤것도 그 안에 들어갈 틈이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아집으로 꽉 막혀 있을 때에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가게 되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은 물사이에 아무런 공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출렁거립니다.

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꽉 차있어서

그 어떤것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물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는

다른 것이 들어갈 공간이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마시는 청량음료는

물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 탄소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일정한 물의 양속에 탄소를 집어 넣어도 물의 양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빈틈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조견오온개공의 안목으로 볼 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생겨날 때

삶은 더욱 발전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꿈꾼다면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긍극적으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작은 나에 집착하지 말고 큰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조견오온개공의 결과가 도일체고액 입니다.

뜻은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간다는 말은 결국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도라는 말은 ‘건넌다’ ‘초월한다’ ‘제도한다’는 뜻으로 받아 들일수 있습니다.

여기서 도란 괴로움의 세계에서 즐거움의 세계로 건너가는

도피안(到彼岸)의 의미로 받아들일수 있습니다.

또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을

건진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체라는 말은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부부싸움 하는 것을  목격 했습니다.

그런데 그스님은 갑자기 싸우는 부부앞에 나아가

자기가 잘 못했노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생전 처음보는 알지도 못하는 스님이

잘못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스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문제 속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경전 > 불교경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야심경5  (0) 2008.08.05
반야심경4  (0) 2008.07.28
반야심경2  (0) 2008.07.13
반야심경1  (0) 2008.07.07
돈과공사상  (0) 2008.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