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절에 이어 어지간한 암자까지 다니며 '계를 받았다' 고 인사를 하고
백련암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성철스님께 인사했다.
"오냐" 하며 절은 받는 큰스님의 얼굴이 활짝 폈다.
"탈도 많고 흠도 많더니만…, 그래도 장삼 입고 이제 중 됐네. 내 시키는 대로 중노릇 잘 해라이. "
큰스님의 격려에 온종일 돌아다닌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듯 했다.
'나도 이제 스님이 됐구나' 하는 기쁨에 공양주 노릇도 신바람이 날 지경이었다.
계를 받고 1주일 가량 지난 날 원주스님이 불렀다.
"큰스님께서 공양주 소임은 끝내고 시찬 소임을 맡기라 하셨으니 이리 따라 오시게. "
시찬(侍饌) 이란 큰스님의 반찬을 만드는 역할이다.
원주스님이 나를 석실(石室) 로 데려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석실은 돌로 만든 반지하 공간으로 10여평 남짓한데
큰스님의 반찬을 만드는 주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별도의 공간까지 마련한 것은 성철스님의 경우
무염식(無鹽食.소금기가 없는 식사) 을 하기에 따로 반찬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공양주만 마치면 좀 편안히 사는가 보다' 고 생각했는데,
공양주보다 훨씬 까다로울 것이 분명한 시찬 소임이 떨어진 것이다.
석실로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날 저녁 예불후에 원주스님이 스님들을 소집했다.
"행자가 계도 받고 스님이 되어 공양주 소임도 끝나고 이제 큰스님 시찬 소임으로 가게 되었으니,
다른 스님들에게 알릴 겸 잠깐 다과회를 갖습니다. "
간단한 과일과 과자가 나왔다.
성철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스님들 중 맏이인 맏사형부터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한 말씀을 하셨다.
맏사형 천제스님은 50년대초
성철스님이 천제굴(闡堤窟) 이란 토굴에서 참선하던중 거두었던 제자라 이름을 '천제' 라 지었다.
"내가 수십년 절 생활했는데, 이번 행자처럼 밥 못하는 행자 처음 봤네.
우째 그리 꼬드밥만 해대는지,
안 그래도 위가 좋지 않아 푹 퍼진 밥을 먹어야 하는데 생쌀 밥만 들어 오니 영 힘들어서…. "
천제스님을 이어 다른 사형들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잘난 공양주 덕에 어지간히 배들 곯았다" 는 얘기들이다.
내심 '엉터리 공양주의 공양을 참아주었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이 적지 않았다.
성철스님의 밥상은 아주 간단했다.
무염식이니 간 맞추려고 어렵게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드시는 반찬이라곤 쑥갓 대여섯 줄기, 2~3㎜ 두께로 썬 당근 다섯 조각, 검은콩 자반 한 숟갈 반이 전부다.
그리고 감자와 당근을 채 썰어 끓이는 국, 어린아이 밥공기만한 그릇에 담은 밥까지가 큰스님 한 끼 공양이다.
아침 공양은 밥 대신 흰 죽 반 그릇으로 대신했다.
반찬이 간단하긴 하지만 워낙 서툰 솜씨라 그나마 손에 익기까지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흰 죽 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아침 죽을 끓이기 위해 저녁에 너댓 숟갈 양 되게 쌀을 씻는다.
밤새 쌀을 불렸다가 아침 조리할 때 물을 따라낸다.
냄비에 참기름 한 숟갈을 두르고 쌀을 넣어 볶는다.
참기름이 쌀에 다 흡수됐다 싶으면 물을 부어 죽을 졸이면 된다.
처음엔 그것도 쉽지않았다.
쌀은 죽이 되게 퍼졌는데, 쌀에 다 흡수되었다 싶던 참기름이 다시 다 나와
방울방울 검게 떠 죽 냄비 속을 제 세상인 양 돌아다니곤 했다.
그런 죽을 밥상에 올리고 큰스님께 갖다 드리려니 영 도살장 가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원주스님한테 죽끓이는 방법을 물어 연습을 했다.
비결은 참기름에 쌀이 노릿노릿할 때까지 잘 볶는 것이다.
보름쯤 지나 참기름이 뜨지 않고 하얀 국물만 도는 죽을 끓일 수 있게 됐다.
당근이나 감자를 2㎜ 두께로 써는 연습을 하다가 손가락를 벤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서툰 솜씨에 엉터리 밥상을 받고서도 큰스님은 아무 말 없이 그릇을 깨끗이 비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