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준비를 위해 뿌린 무.배추의 새싹이 막 땅에서 고개를 내밀던 한여름이었다.
성철스님이 찾는다는 전갈에 큰스님 방으로 갔다.
별다른 사고나 실수를 하지 않았기에 '무슨 영문인가' 하며 긴장한 채 앉았다.
"전에 내가 니보고 법명 받지 말고 평생 행자로 살아라 했제?"
큰스님이 지긋이 보는 눈길이 아주 자애로웠다.
그래도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무슨 일이 또 터질지 모른다' 는 생각에 조심조심 '예' 하고 대답했다.
큰스님이 아무 말 없이 한참 뜸을 들인다.
"그때는 내가 화가 나서 그랬제.
내가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삼밀이는 나이도 많고 그동안 내 시봉을 잘 하길래 그 원조(圓照) 라는 불명(佛名) 을 줄라했는데,
그 일당들이 한사코 반대해서 못 줬지. 이름이 문제가, 사는 것이 문제지!
그런데 오늘 내 니한테 불명을 주기로 했다.
조금 있으면 사미계(沙彌戒) 를 받을텐데, 그러면 니 불명은 이걸로 하거래이. "
성철스님이 준비해 두었던 흰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한자로 '원택(圓澤) ' 이라는 두 글자.
지금까지 내가 지녀온 법명(法名.불교식 이름) 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평생 행자로 살아라" 는 큰스님의 말을 들었을 때,
'언젠가 불명 주실테니까, 그때까지 잠자코 있어야지' 라며 섭섭함을 달랬었는데.
갑자기 법명을 주시니 그렇게 고맙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
큰스님의 당부가 이어졌다.
"이름 받았다고 중 다 된 거 아이다. 불명을 받았으니 중 이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제. "
즐거운 마음으로 물러나오는데, 2년전 나에게 "백련암 놀러가자" 고 꼬셨던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나를 보고
"너는 큰 연못 같다. 남의 말을 그렇게 다 잘 들어주니 큰 연못 아이?...라고 말해주곤 했었다.
친구가 말한 '큰 연못' 이 바로 내가 받은 법명 '원택' 의 뜻이 아닌가.
혼자 "그 친구가 평소 내 중 이름까지 지어두었나" 라고 중얼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법명은 사미계를 받기위한 절차의 하나다.
큰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고 며칠 지난 무렵 큰절에 내려가 계를 받았다.
당시 강원(講院.교육기관) 에 강사로 있던
지관스님(현 조계종 원로.가산불교문화연구원장)을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예비승이 되었다.
은사는 성철스님이고, 계사는 지관스님인 것이다.
비로소 가사와 장삼을 받았다.
행자시절엔 떨어진 옷을 입어야 했지만 사미계를 받자마자 바지.저고리를 새 옷으로 한 벌 얻어 입었다.
새 옷을 입고 관례에 따라 산중 어른 스님들에게 인사를 다녀야 했다.
친구스님에게 이끌려 선원(禪院.참선공간) 유나(維那.책임자) 인 지효(智曉) 스님께 갔다.
성철스님의 사제(師弟.절집의 동생뻘) 되는 큰스님이다.
삼배를 올리고 끓어 앉았다.
"그래, 너거 스님이 별난 스님인데 니 불명은 또 어떻게 지어주던고?"
성철스님께서 상좌들에게 법명 하나 지어주는 것도 이렇게 스님들이 관심을 가지는 일인 듯했다.
"예, 스님께서 원택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
갑자기 지효스님이 얼굴색을 바꾸었다.
"뭐라, 니 법명을 원택이라고? ........니가 원택이라!
너거 스님 법문할 때 곧잘 원택이를 들먹거렸는데, 니가 원택이라…. "
원택이라는 법명에 무슨 사연이 있음에 분명했다.
백련암으로 올라오면서 궁금해 친구스님에게 물었다.
"원택이라고 불명 받은데 대해서 왜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친구스님은 "나도 몰라요" 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무슨 곡절이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속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언감생심 큰스님한테 물어볼 수도 없지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