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수월스님

내딛는 발걸음 속 자비의 바람

敎當 2017. 1. 25. 18:10

수월이 소먹이 일꾼 노릇을 하며 지내던 회막동은

냉혹한 역사의 거센 바람이 가장 드세게 몰아친 곳 가운데 하나였다. 

길상 동자가 삼 년 동안 소 노릇을 한 뒤 김서방 집을 떠났듯

수월도 삼년이라는 세월을 소먹이 생활로 바치고 회막동을 떠났다.

그러나 수월을 기다리고 있던 수분하 생활은

길상이 돌아간 우번대의 문수 회상이 아니었다.

 

수월이 걷고 걸어서 찾아간 흑룡강성의 수분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동쪽 경계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당시 많은 조선 사람들이 목단강과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 땅으로 정처 없이 흘러 들어갔으니,

수분하는 또 다른 도문이었던 셈이다.

 

참으로 그곳은

온갓 형태의 꿈, 한숨, 슬픔, 기쁨, 절망, 진실, 사랑,

거짓과 음모가 물살 짓는 국경 도시였다.

5월이 다가도록 철없는 눈이 천지를 휘몰아치는

그 하늘 아래 헐벗고 굶주린 조선 유랑민들이

절망과 가난 속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고 있었던 것이다.

 

도문에서 수분하까지는 어언 오백리 길이다.

수월은 주로 일제가 닦아놓은 군사도로로 다녔을 것이며

때로는빠른 샛길을 따라 걷기도 했을 것이다.

역사의 파도에 밀려 북으로 올라가는 조선사람들 틈에 끼어

때로는 아이를 대신 없고 가기도 하고

때로는 아파 누운 병자들을 고쳐주기도 했으리라.

 

도문에서 수분하로 가는 길을 걸으면

마치 자신이 큰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가랑잎 같은 배처럼 느껴진다.

높은 산은 없지만 꺼졌다 일어섰다 하는 수많은 언덕들이

큰 바다의 파도가 되어 하늘 가득 넘실거린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 눈앞에 보인다.

앉아도 걸어도 움직인다.

들도 하늘도, 밤도 낮도 움직인다.

죽은 자는 바다에서 살 수 없다.

그들은 파도에 밀려 끝네 바닷가에 버려진다.

살려면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파도를 타고 파도를 거스르고

물속 깊은 곳을 빛살처럼 가르고 들어가야 한다.

수월은 길을 걸으며 알았을 것이다.

그가 밟고 가는 땅 기운이야말로 바로 고구려의 혼이요

고구려의 힘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초가지붕 위를 덮고 있는 박꽃

세숫대야만한 해바라기꽃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는 농사꾼,

크고 작은 강줄기를 따라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

누렇게 익은 벼가 끝없이 펼쳐지는 가을 들판

옥수수밭을 스쳐가는 바람결

감자밭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

푸른 소나무 위에 내려앉은 흰 구름.....

이런 풍경들은 여든 해 전에 수월이 걷던 길머리에서도

흔히 보던 모습들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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