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수월스님

자비의 바람이 되어

敎當 2017. 1. 19. 14:18

두만강을 건넌 수월이

마을 사람 옷차림을 하고 세 해 동안 소먹이 일꾼 노릇을 하며

보살행을 배푼 회막동이라는 곳이 당시 도문에 있었다.

 

수월은 경원 땅 두만강가에서 살림도구와 어린 것들을 지고 업은채

무리지어 샛섬을 향해 떠나는 조선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났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수월은 법복을 벗어던지고

빈손으로 그들의 긴 줄에 두만강을 건넜으리라.

 

수월이 두만강을 넘던 무렵

간도를 향해 줄을 있던 조선 사람들의 행렬에는

나라를 찾기 위해 조국을 떠나는 피끓는 의사, 열사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1910년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뒤

나라 안에서 싸우던 의병들도 국경을 넘어

잇달아 만주나 연해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만주나 연해주에다

일제에 맞서 싸울 항일 기지를 세우고자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두만강의 사람 키를 넘는 풀밭을 헤치고 들어가

선조들의 뼈가 묻혀 있는 고국 땅을 향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절을 올린 뒤 정처없이 닻을 올리고

떠돌아야 했던 힘없는 조선 민초들이 겪은 수많은 풍파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활 환경부터 문화 전통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람들이 누려오던

삶의 부가가치는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수월이 세 해 동안 머문 회막동은

두만강을 건너면 걸어서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온성 땅과 마주하고 있는 중국 도문에서는 두만강을 도문 강이라 부른다.

 

"도문"이란 "골짜기"

또는 원나라 때 벼슬 이름인 "만호"를 뜻하는 여진족 말"두맨"

중국 말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수월이 세 해 동안 이 산에서 보낸 것은

빈털터리로 들어온 조선 사람들에게 비록 한 끼 나마

주린 배를 채워주고 먼 길을 떠나는 그들의 외로운 등을

토닥거려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 모습을 한 수월은 이곳에서 소먹이 일꾼 노릇을 했다.

그때 수월의 나이가 쉰여덟에서 환갑 때까지였으니

소 치는 아이가 아니라 소 치는 할아범이었다.

 

일이라면 이골이 난 수월

그가 기르던 소는 한두 마리쯤이 아니라

많으면 수십마리에 이르는 꽤나 큰 소 떼였던것 같다.

날이 밝으면 풀밭에 풀어놓고 어두워지면 불러 모으고

겨울이면 쇠죽을 끓여먹이고 또 틈틈이 목욕시키고

빗질까지 해주어야 했을 수월의 손질은 정신없이 바빴으리라.

 

그러나 수월은 이런 바쁜 틈새에도 밤마다 밤을 새워 집신을 삼고

낮에는 소 치는 짬짬이 틈을 내어 큰 솥에 밥을 지었다.

그것은 하루에도 몇십 명씩 마주치는 조선 사람들을

먹이고 또 그들의 발을 싸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여기에 쓰인 식량이며 짚 다발은

모두 자기가 받는 품삯으로 채워서 메워갔다.

 

산을 넘어온 조선 사람들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집신 가운데

발에 맞는 것을 골라 신고, 길가 넓적바위 위에 쌓아놓은 주먹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태어나서 처음 고향을 떠나온 그들

게다가 말로만 듣던 낯선 땅에 첫발을 들여놓은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움츠러들고 두려웠을 것인가.

수월이 내놓은 집신과 주먹밥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봄눈 녹듯 녹여서 밝고 희망찬 내일을 꿈꾸게 하기에 넉넉했으리라.

 

수월은 집신을 삼고 주먹밥을 만들었을 뿐

누구에게도 그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백두산 기슭 회막동에서 보여준 수월의 삶은 부처에게도 물들지 않는

참으로 맑디맑은 자비의 모습을 깨닫게 한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이나 부처님께 감사하라거나 부처님을 찬미하라는

참으로 부질없는 말을 한 마디도 지껄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집신을 삼는 자신이라는 세계도

그것의 피안인 부처의 세계도 다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어쩌면 제 주린 배를 채우려고 밥을 지었고

제 아픈 발을 감싸려고 집신을 삼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밥을 먹고 집신을 갈아 신고 가는 조선 사람들은

수월에게는 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이었으니 말이다.

깨닳은 이에게는 온 몸뚱이가 깨닳음의 눈이듯이

자비로운 보살에게는 감사를 받을 나의 모습이나,

감사를 해야 할 너의 모습이 따로 발붙일 구석이 없었다.

 

수월은 그가 사랑한 저 지리산의 가을빛같이

누런 조선 소들을 정성을 다해 길러

조선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터를 일구는 간도 벌판의 논밭으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런 조선 사람들을 위해 죽는

한 마리 소가 되고자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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