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수월스님

해는 지고

敎當 2017. 1. 16. 16:03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였다.

경허가 밝은 눈을 갖춘 큰 선지식임을 굳게 믿고 수행하던

만공, 제산, 남전은 한자리에 모여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이 경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과 헌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했다.

 

먼저 율행과 학덕이 뛰어난 제산이 입을 열었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조실 스님께 곡차와 닭고기를 바칠 것입니다." 

그러자 남전이 제산의 말머리를 받았다.

"나는 스님을 위해서라면 닭이 아니라 소라도 잡아 올리겠소."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만공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 깊은 산중에 먹을 양식이 다 떨어지면

나의 살점을 점점이 오려서라도 스님의 목숨을 건질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아가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시도록 하겟습니다."

 

그러나 병이 깊은 몸으로 살을 에는 듯한 갑산의 찬 바람 속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경허 곁에는 그 누구의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스승에 대해 아무말 없이 묵묵히 정진에 힘쓰던

수월만이 홀연히 나타나 그를 불러준 것이다.

 

"스님!" 하고...

사랑하는 제자가 불러준 이 한 마디는

경허가 어언 여섯 해 만에 처음 들어보는 자신의 본디 빛깔이었으니

이 무지개빛 이름을 다시 맞는 순간 바람 찬 숲처럼 술렁거렸을 경허의 가슴이 눈에 잡힐 듯 선하다.

 

수월에게서 스님이라는 호칭을 들은 지 두 해 뒤인

어느 봄날 경허는 혼자서 열반에 들었다.

수월은 스승의 곁을 그냥 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 모습을 하고 병들어 누워 있는 스승을 위해

무엇인가 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수월이 스승에게 올린 공양거리는

제산이 말한 곡차나, 남전이 말한 쇠고기나.

만공이 말한 자신의 살점이 아니었다.

다만 정성을 다해 삼아드린 집신 한 켤레였다.

수월은 그저 집신 한 켤레를 정성껏 삼아

마치 부처님 앞에 차를 올리듯 댓돌 위에 올려두고 나온 것이다

 

수월을 " 집신선사 " 라고도 불렀다.

그것은 수월이 집신 삼기의 명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워낙 다른 사람들에게

집신을 삼아주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월은 비록 먼발치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번 보기만 하면

발에 딱 맞는 집신을 여지없이 삼아 냈다고 한다.

오가는 길손들에게 집신 공양을 하는 일은 수월이

스승을 떠난 뒤부터 날마다 하는 일이 되었다.

 

전해오는 말로는 수월이 집신 삼기의 명수가 된 것은

다 스승인 경허에게서 전수받은 비법 덕분이었다고 한다.

경허 또한 어릴 때부터 부모의 눈길을 피해가며 집신 삼기를 좋아하더니

산으로 들어간 뒤로는 그 솜씨가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던가.

 

몸집이 육 척이나 되다보니 시장 거리에서는

발에 맞는 신발을 구할 수도 없었고

또 집신 삼는 일이 그냥 좋기도 하여 곧잘 자신의 신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발까지도 즐겨 삼아주던 경허였다.

이제 수월은 그런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지로

스승께 드릴 마지막 신발을 삼아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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