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금봉 선사

敎當 2013. 11. 2. 20:21

 

 

△ 금봉선사가 입적하기 전 해인

1958년 쓴 <보장록>에 끼워져 있던 그의 사진.

 

충남 예산 덕숭산 정상 부근 정혜사는 마음의 눈까지 트이게 할만큼 시야가 트여있다.

눈이 시릴만큼 이 푸른 하늘을 향해 후련하게 내뿜는 담배의 맛은 오죽했을까.

늘 담배를 입에 달고 산 담배도인이 금봉 선사였다.

정혜사 만공 선사의 문하엔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즐비했다.

많은 제자들 중 만공의 뒤를 이은 조실이 금봉이었다.

문경 대승사로 출가했던 금봉이 덕숭산에 온 것은 1922년께였다.

 

금봉은 오전 참선을 한 뒤엔 절 아래 주막집으로 내려가 술을 동이째 들이붙곤 했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왔는데 선방 복판에 만공이 버티고 앉아있었다.

술에 취한 금봉이 “만공! 너 왜 거기에 앉았노? 내려 와!”라며 양손으로 귀를 찢어질만큼 잡아당겼다.

귀를 당기니 만공은 금봉의 손을 따라 네 발로 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방 정면 큰문인 어간문에서 만공의 엉덩이를 발로 차버렸다.

만공은 방에서 툇마루로 툇마루에서 마당까지 떨어져 버렸다.

천하의 만공은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말 한마디 없이 거처인 금선대로 내려갔다.

 

다음날이었다.

만공이 금선대로 금봉을 불렀다.

“어제 일을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이(理)로 그랬느냐, 사(事)로 그랬느냐”

죽고 사는 갈림길이었다.

이치를 따지자면 누구에게 지지않을만한 위인이 금봉이었다.

‘이로 그랬다’고 이치로 대거리를 한다면

김좌진 장군도 당할 수 없었다는 천하장사 만공에게 맞는 일만은 능히 피할 수 있었다.

“사로 그랬습니다.

 

그러나 금봉은 술취해서 한 ‘짓’을 이실직고했다.

만공이 엉덩이에 단소로 내려친 단 한방에 금봉의 엉덩이가 30센티나 찢어졌다.

금봉은 그 뒤 화장실에 갔다하면 찢어진 상처가 다시 터져버려

무려 40일 동안 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실책과 상처가 반드시 나락으로만 떨어지고

극락으로 회향하는 파격이 없다면 어찌 선의 묘미가 있겠는가.

이 일로 만공은 금봉을 알아보고 금봉은 만공을 알아보았다.

피터지는 매질 속에서 깨달음을 주고 받는 염화미소의 싹이 움튼 것이다.

 

덕숭산의 조실은 만공-금봉-전강 선사로 이어진다.

금봉이 부안 내소사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을 때

불과 23살에 견성(본성품을 봄·깨달음)한 전강이 찾아와 시비를 걸어왔다.

금봉이 버릇 없다는 표정으로 담뱃대를 털자 새파란 전강은

“깨달음에 선참(선배) 후참(후배)이 어디 있느냐”며

“스님이 틀렸다면 스님도 제게 인가를 다시 받아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네 말이 옳다. 그래 일러 보아라.”

이겨보았댓자 털끝만큼도 자랑스러울 것 없는 대거리에 금봉이 기꺼이 응수한 것이다.

 

정혜사 선원장 설정 스님(64)은

“전강 스님이 평소에 가장 존경했던 사형이 금봉 스님이었다”고 회고했다.

불과 33살에 통도사 조실을 하고

천하의 선지식들조차 그에게 3배를 할만큼 대단했던 전강조차 금봉의 너른 품엔 고개를 숙인 것이다.

금봉은 평소 괴각(괴짜)과는 거리가 먼 무골호인이었다.

화계사 진암 스님(81)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던 금봉 스님은 사람이고 음식이고 뭐든 통 싫어하는 게 없었다.

막행막식을 하면서도 무슨 음식을 보아도 ‘좋다, 좋다’ 할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1950년대 중반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던 서울 안국동의 선학원엔

효봉·동산·금오·청담 선사 등 선지식들이 머물고 있었다.

한 때 금봉이 이곳에 머물자 담배 연기가 싫어 어느 누구도 그와 한 방을 쓰려하지 않았다.

훗날 종정을 지낸 효봉은

“너희들은 어찌 담배만 보고, 금봉의 도(道)는 보지못하느냐?”고 꾸짖고는

스스로 목침을 들고 금봉의 방으로 갔다.

효봉은 지독한 담배 연기 속에서 연신 쿨룩쿨룩 기침을 해가면서도

법향(깨달음의 향기)을 맡듯이 금봉의 곁에 머물렀다.

 

만공으로부터 역시 전법(깨달음 인가)을 받은 태안 안면도 송림사의 동산 선사(92)는

해인사 조실로 있던 금봉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었다.

1959년 가을 어느날 금봉은 시자를 떼어놓고 홀로 계곡으로 올라가 목욕을 한 뒤

바위에 앉아 그대로 몸을 벗었다고 한다.

그런 금봉임에도 근현대 선사의 수많은 전기와 논문 기사에서 그는 늘 열외였다.

무려 1천600여쪽에 달하는 조계종의 선원총람에서도 일언반구가 없다.

어떤 문중에 속하거나 상좌(제자)를 두는데 무신경했던 이에 대한 불교계의 대접이 이렇다.

그래서 그의 생몰연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다만 평생의 도반인 고봉(1890년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동국대 중앙도서관 이동은 사서와 이철교 출판부장은

한나절을 씨름한 끝에 고서실에서 금봉의 생전 법어집인 <보장록>과

그 책에 끼워진 흑백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금봉은 지금 명성과 함께 이 책과 사진마저 연기로 날려보내지 못한 것을 자탄하며 장죽을 털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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