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고봉선사

敎當 2013. 10. 13. 20:02

대구 팔공산 서쪽 용담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30분 가량 오르니 파계사 성전암이다.

암자의 가파른 벼랑 아래엔 3백년 된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있다.

일체의 틀과 형식을 격파해버린 고봉선사(1890~1961)처럼

뭇나무들과 어깨동무를 하지 않고 홀로 하늘을 벗 삼고 있을 뿐이다.

 

대구 목골마을에서 태어난 고봉은 18살에 결혼했으나 1년 뒤 방랑길에 나섰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란 자부심과 애국심이 강했던 청년 유생 고봉은

출가를 위해 경남 양산 통도사에 가서도 양반 행세를 했다.

“그놈들 집 한 번 잘 지어놨구나. 여보게, 거 누가 내 머리 좀 깎아주지않겠는가?”

젊디 젊은 청년이 천하제일사찰이라는 대찰에 와 승려들에게 반말지거리를 하자

승려들은 별 미친놈 다보겠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대장부였던 혜봉 선사에게 데려다주었다.

 

“너를 거드름피우게 하는 물건이 무엇인고?”

혜봉이 아만에 대한 철퇴이자 그의 윤회를 끊어낼 검을 던져준 것이다.

혜봉은 고봉의 기고만장한 아만심이 꺾어지길 기다린 것인지

행자생활을 한 지 몇 개월이 지나도 머리를 깎아주지 않았다.

스승을 따라 상주 남장사로 간 고봉은

어느 날 새벽에 법당에서 예불을 마친 뒤 스스로 머리카락을 깎아버렸다.

고봉의 출가길은 처음부터 독불장군 식이었다.

 

고봉은 출가 뒤 스승을 떠나 공부길에 나섰다.

전라도의 외딴섬과 석금산에서 바위처럼 용맹정진하던 그가 성전암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더욱 화두에 몰입하던 그는

화장실에 앉았다가도, 또는 걷다가도 삼매에 들어

온종일 꼼짝 않을 만큼 집중하고 있었다.

 

출가 4년째인 1915년 4월 봄날이었다.

아침에 꿩 한 쌍이 서로를 부르며 울어대는 소리가 귓전에 닿는 순간

가슴 속에서 붉은 태양이 솟으며 그를 둘러싼 철벽이 자취를 감췄다.

해방이었다.

고봉은 견성 뒤 당대의 선지식 만공선사를 찾아 덕숭산으로 갔다.

고봉은 옷을 홀라당 벗고 몸에 먹을 가득 묻히고선 백지 위에 엎드렸다.

백지엔 그의 남근이 도드라지게 찍혔다.

고봉이 조실 방에 가 종이를 내놓으니 만공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가 지금 법(진리)을 묻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장난을 하는 것이냐?”

만공이 고봉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모진 매질에도 고봉의 얼굴은 구름을 시비 않는 하늘이었다.

경계에 끄달리지않는 고봉의 견성을 인정치 않을 수 없던 만공은

드디어 (깨달음의) 인가 법어를 내렸다.

 

‘법은 꾸밈이 없는 것, 조작된 마음을 갖지마라.’

드디어 산문 안에서 일대사를 해결한 고봉은 불현듯 승복을 벗어버린 채 대구로 향했다.

국권을 상실한 이 나라와 동포를 두고 볼 수만 없다는 것이었다.

고봉은 1919년엔 3천여 명이 대구 남문 밖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을 주도해

마산교도소에서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고봉은 이 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그 뒤 평생 몸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몸은 기울어가도 그의 기상은 사그라지는 법이 없었다.

덕숭산에서 고봉의 말년에 함께 정진했던 서울 화계사의 진암 스님(80)은

“고봉스님은 일체 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나오는 대로 행동하는 괴각(괴짜)이었다”고 회고했다.

 

고봉은 술을 좋아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돌아와 시자에게 발을 씻기게 하자 짓궂은 승려들이

“더럽고 깨끗한 것은 둘이 아닌데 발은 씻어 무엇 하냐”고 물으라며 시자를 부추겼다.

시자가 이 질문을 하기 무섭게 고봉은 발가락을 시자의 입에 넣었다.

놀란 시자가 연이어 침을 뱉자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닌데 발가락이 입으로 들어간들 무슨 대수더냐”며 껄껄 웃었다.

그의 선지는 이렇게 민첩했다.

 

고봉은 거칠 것 없는 언행에 풍채가 좋고 얼굴이 잘 생겼다.

그를 한 번 보고 반한 대구의 명기 명월관 주인이 목욕재계한 뒤 속옷까지 갈아입고 그를 초대했다.

술이 취한 고봉은 여인의 거문고소리에 맞춰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여인이 잠자리에 그를 모시려 할 즈음 고봉은

“이제 안락 삼매에 들 시간이다. 내가 부를 때까지 나를 깨우지 마라”며

‘이뭣고’(이것은 무엇인가) 화두를 든 채 죽은 듯 좌정했다.

고봉이 이렇게 앉은 채 3일을 삼매 상태에서 보내자 그 여인은 옷매무새를 고치며 불자의 길로 들어섰다.

 

성전암엔 몇 시간을 기다려도 고양이 한 마리 외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고봉, 성철 등 대선지식이 선의 길을 연 곳이지만 오던 외길 외에 달리 통하는 길도 없다.

고봉은 열반 때 ‘다만 알지 못할 것인 줄 알면 그것이 곧 견성’이라는 말을 남겼다.

열반한 그의 제자 숭산 선사는 이를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로 바꿔 세계에 선을 알렸다.

선과 교 양쪽에서 모를 게 없을만큼 박학했던 고봉이 결국 일심으로 도달한 곳이 어디였던가.

‘오직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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