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법회선사

敎當 2013. 9. 26. 12:46

 

△ 경기도 용인 법륜사 극락암에 모셔진 법희선사 영정 사진.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호젓한 솔밭길을 5리쯤 오르니 견성암이다.

멀리 보면 돌담 너머로 옹색한 듯하지만

정작 ‘견성’(성품을 봄·깨달음)의 자리는 툭트여 넘침도 모자람도 없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비구니 수좌(선승)들이 수행하는 곳이다.

오고가는 니승(여승)들의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는 듯하다.

다시 수덕사에서 20여리 떨어진 가야산 보덕사 선방 옆 연못 위엔 단아한 부도탑이 서 있다.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날으는 백설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느 누가 당대의 문장가 탄허 선사로부터 이런 칭송을 받았을까.

한 니승이었다.

여성의 자기 비하 등이 만들어낸 이런 ‘정신적 감옥’은 여성 출가자가 넘어야할 첫 관문이었다.

더구나 조선 500년 동안 ‘남존여비’의 인습에 묶여 있던 뒤끝의 여성들이야 두 말할 나위가 있었을까.

90여년 전.

그럼에도 덕숭산에 25살의 한 니승이 찾아왔다.

훗날 덕숭산의 비구니총림이 된 견성암의 초대 총림 원장 법희 선사(1887~1975)였다.

 

충남 공주 탄천면에서 태어난 법희는 세살 때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할머니 등에 업혀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맡겨졌다.

경북 김천 청암사에서 경전을 공부하던 그가 ‘덕숭산에 도인 스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허의 법제자 만공 선사를 찾아왔다.

홀로 3일을 쉬지 않고 걸어 녹초가 된 그가 덕숭산 정상 정혜사로 들어서자,

만공은 “이런 수좌가 올 줄 알았다”고 기뻐하며 입실(참선 제자로 받아들임)을 허락했다.

비구니가 비구들처럼 참선 정진하며 수좌가 된다는 것은 어림도 없던 시절이었으나

만공은 이 나라 여승들의 참선 길을 과감히 열어젖혔다.

 

화두선을 하려면 세 요소가 필수적이다.

신심(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

분심(그런데도 자신의 불성을 보지 못하는 분함),

의심(이토록 명백한데도 왜 나는 알지 못하는가 하는 의심)이다.

선사들은 이 마음이 없으면 수억 겁을 앉아있더라도 소용없는 짓일 뿐이라고 한다.

 

만공은 이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천재였다.

당시 덕숭산엔 가는귀가 먹어 대중들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한 니승이 있었다.

만공은 그 니승을 몰래 산 속으로 불러내 자신의 계략을 꼼꼼히 일러주었다.

다음 날 수많은 대중들이 수덕사 대웅전에 모인 법문 때였다.

법좌에 오른 만공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숨을 죽인 대중들 앞에 주장자를 높이 들었다.

그 때 그 니승이 대중의 뒤에서 일어나 벼락 치듯 “할”하고 외치더니,

법당 안을 조용히 세 바퀴 돌고선 물러나 앉았다.

만공이 “네가 드디어 알았구나”라고 (깨달음을)인가하니,

대중들은 ‘어떻게 저런 바보가 깨달을 수 있을까’란 생각에 의아해했다.

 

만공이 한참 설법을 하다가 이번엔 조용히 단주를 들어올렸다.

대중들은 그 뜻을 몰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데,

다시 그 니승이 나와 만공에게 3배를 하고 물러앉았다.

만공은 “그것 봐라, 틀림 없지 않느냐”며 인가를 재확인해주었다.

저런 바보도 깨닫는데, 자신들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으니,

다른 비구, 니승들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덕숭산은 분심과 의심으로 넘쳐 흘렀고,

누구도 잠을 자려하지 않고 용맹 정진했다.

니승들은 결코 얻기 어려운 참선 기회를 놓칠세라 잠을 잘 수 없었고,

비구들은 그런 니승들에게 뒤지면 어쩌랴 싶어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심으로 정진하던 법희가 30살 되던 해.

드디어 마음이 홀연히 열려 만공의 인가를 받음으로써 근대 비구니 선맥의 주춧돌이 놓여졌다.

 

북한산 승가사를 오늘의 거대 사찰로 키운 상륜 스님(76)은 출가한 날부터 스승 법희를 한 방에서 모셨다.

승가사에 이어 불사 중인 용인 원삼면 법륜사로 찾아갔다.

밤 12시면 일어나 활동을 시작해 새벽에 하루 일을 다해버려

늘 주위를 놀라게 하는 그의 부지런함은 스승을 닮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자신은 스승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스님(법희)이 잠을 두 시간 이상 자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낮엔 늘 울력하고 도량의 풀을 뽑았는데 얼마나 일을 했던지 손가락이 크게 휘어져 있었지요.

달 밤에도 남몰래 텃밭에서 호미질을 했고, 자는가 싶어 보면 늘 앉아 참선하고 있었지요.”

 

그런데도 대중들이 법(진리·깨달음)을 물어도 법희는 아는 체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비구니 선맥이 자리 잡기도 전에 꺾일 것을 두려워한 만공의 뜻에 따른 행동이기도 했다.

만공의 뒤를 이어 덕숭산을 이끌던 벽초 선사는 상륜 스님에게 입버릇처럼

“너희 스님의 진가는 200년 뒤에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법희의 영정 사진을 뒤로 하고 법륜사 마당에 나서니 대웅전엔 대규모 돌부처가 모셔지고 있다.

단박에 ‘성’과 ‘편견’의 굴레를 벗어버린 법희의 할을 한 줄기 봄바람이 전해준다.

이 돌부처는 남성인가, 여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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