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동산선사

敎當 2013. 8. 20. 11:06

 

‘이 문을 들어선 순간 가진 것을 모두 놓아라.’

태백산맥 최후의 혈처 부산 금정산 범어사 경내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손님을 맞는 것은 날 선 글귀다.

선찰대본산의 칼날이다.

이야말로 일체 관념조차 ‘무소유’하라는 ‘선의 본가’다운 경책이다.

 

돌계단 위엔 요즘 매주 토요일 선사들을 초청하는 설선대법회가 열리는 보제루가 있다.

주위엔 대나무 숲이다.

동산 선사(1890~1965)가 깨달음을 얻어 억겁 동안 지고 다닌

천근의 무게를 단칼에 싹둑 베어내고 비상한 그 숲이다.

동산은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초석을 놓은 용성 선사의 제자다.

또한 선의 꽃을 피운 성철 선사의 스승이다.

 

동산이 스승 용성을 만난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의학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22살 때였다.

그에게 용성이 물었다.

“상처와 종기가 든 육신의 병은 의사가 고친다하지만,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마음의 병은 어찌하겠는가?”

동산의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미치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의 병’은 어찌해야하는가. 이것은 벌써 동산의 화두가 되었다.

 

그는 의전을 졸업했지만 출세가 보장된 양의의 길을 포기하고 입산했다.

고향 충청도 단양에서 그를 기다리는 노부모와 아내, 아들에겐 충격적인 ‘가출’이었지만,

그에겐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기 위한 ‘출가’였다.

그는 평안도 맹산 우두암과 도봉산 망월사와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전암, 태백산 각화사, 백운산 백운암, 황악산 직지사 등에서 용맹정진했다.

스승 용성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자

용성은 도봉산 망월사에 머물며 스승의 옥바라지를 했다.

만해의 제자로 그 역시 스승 옥바라지에 여념이 없던 춘성 선사는 훗날 동산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 달에 한 번 면회하고 오면 둘이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앉아 정진을 했다.

그런데 밤이 깊은데도 동산 스님은 통 눕지를 않았다.

그래서 ‘건강을 생각해 쉬어가며 하라’고 했더니,

‘우리 스님께서는 감옥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시는데 내 어찌 편히 지내며 잠이나 자겠소’라고 했다.

젊어서는 그의 정진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수행이 무르익어 범어사로 돌아온 뒤 37살에 바람에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에

홀연히 ‘마음의 병’을 놓아버린 동산은 이 때부터 중생의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동산의 품으로 수많은 이들이 찾아들었지만

당시 절은 양식이 늘 부족해 입 하나 느는 것을 두려워했다.

더구나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결혼을 해 가족이 있는 대처승들이

주지를 비롯한 주요 직책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조실인 동산이 이끄는 선원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양식만 올려보내주었다.

그런데도 동산은 사람을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 밑으로 출가한 상좌만 수백명이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가운데 성철을 비롯하여 동국대 역경원장을 지낸 자운, 범어사 조실을 지낸 지효,

현 범어사 조실 지유, 불광사 창건주 광덕, 쌍계사 조실 고산,

동산반야회 회주 무진장 능가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그에게 출가했다.

그는 이토록 뛰어난 제자들과 수많은 불자들의 추앙을 받는 스승이었지만

새벽 2시면 일어나 온종일 수행자로서 흐트러짐이 없었다.

젊은 시절 범어사에서 동산을 6년간 시봉했던 고산 스님은

“큰스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예불을 빠지는 법이 없었다.

또 아침마다 손수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했다.

청소 뒤엔 금어선원에 들어가 참선 정진을 했다.”

 

동산은 청소를 위해 몸은 굽혔으나 마음은 당당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6일 범어사에서 전몰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위령제가 예정된 오전 10시보다 1시간도 더 늦은 시간에야 범어사에 도착했다.

중절모를 쓴 채 대웅전에 들어선 이 대통령이 유엔사령관을 비롯한 외교사절들에게

법단 위의 불상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뭔가를 설명했다.

동산이 이 때 소리를 질렀다.

“이것 보시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분이 감히 부처님께 손가락질을 한 단 말이요.

그리고 법당 안에 들어오면 누구나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요.”

이에 이 대통령은 실수를 인정하며 용서를 청했다.

동산의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 대통령은 다음해 1월 범어사를 다시 찾았다.

이 때 대통령이 눈 쌓인 산사의 경치를 찬탄하자 동산은

“경치는 옛 모습 그대로지만 속 알맹이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비로소 일제 36년 간 대처승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독신 수도승이 겨우 빌붙어 살아가고 있는 기막힌 현실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날 만남이 ‘대처승을 절에서 몰아내라’는 이 대통령의 특별유시로 이어졌다.

36년 간 병든 불교계 수술의 시작이었다.

 

동산은 조계종 종정을 두 번이나 지내며 불교 정화를 지휘했다.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출가한 의사 동산의 수술칼은 살인검인가, 활인검인가.

새벽녘 도량을 쓰는 눈 푸른 납자들과

서리를 인 푸르른 소나무가 말 없이 답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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