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보문선사

敎當 2013. 12. 8. 16:14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성산 오대산 상원사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문수보살 상이 모셔진 문수전에서 행자복을 입은 40여 명의 재가불자들이 참선 중이다.

철야 용맹정진이다.

 

조계종 초대 종정인 한암 선사(1876~1959)의 탄신을 맞아 오대산문은

재가 불자들을 초청해 월정사와 상원사에서 1박2일 동안 수행학림을 열었다.

70여 년 전 상원사에선 한암의 지도 아래 전설 같은 용맹정진이 있었다.

한국 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종정 조실 한암은 독방에 머물지 않고 평생 대중방에서 살았다.

승려들이 함께 자는 대중방은 비좁기 그지 없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자야 할 정도였다.

절에선 드디어 조실채를 지었다.

그러나 한암은 조실채에 살기를 거부한 채 한사코 대중방에만 머물렀다.

 

한암은 아까운 새집을 비워둘 수는 없어 수좌(선승)들이 정진하도록 했다.

수좌들은 “조실 스님 모시려고 지은 집에 우리가 들어가는데, 평소와 똑 같이 정진해선 안 될 일”이라며,

가행(평소보다 더)정진으로 동안거(겨울철 90일 집중 수행)를 나 조실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했다.

1) 90일간 잠을 자지 않는다.

2) 만약 중도에 포기하면 다시는 오대산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한다.

3) 이 기간에 죽으면 시신을 눈 속에 넣어두고 장례는 90일이 지난 뒤에 치른다.

 

이런 살벌한 전제조건에도 지원자가 30명이나 됐다.

이 가운데 30살이 넘어 갓 출가한 신참도 말석에 앉아 용맹정진 대열에 동참했다.

보문 현로(1906~1956)였다.

 

용맹정진에서 눈꺼풀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선종의 초조 달마조사는 수마를 이겨내기 위해 눈꺼풀을 싹둑 베어내 버렸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참인 보문은 새벽별처럼 형용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눕지도 자지도 않는 정진 보름째.

보문이 해우소(화장실)에 가던 중이었다.

돌부리에 채어 넘어져 돌에 정강이를 찧어 “아야” 소리를 지르는 순간,

 ‘아픈 그 놈’의 근본 당체가 홀연히 드러났다.

견성(見性·성품을 봄)인가, 현성(現性·성품이 나타남)인가.

그 때부터 넘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설신을 신고 밤낮으로 오대산을 뛰어다니던 보문은

한암의 시험을 여지 없이 통과하고 본래 성품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상좌(제자)를 두지 않기로 했다.

그의 유일한 상좌인 희섭 스님은 한암이 받아들여 보문의 상좌로 만들었다.

희섭의 제자가 해인사 강주를 지낸 무관스님(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과

중진 선승들의 중심 인물인 무여스님(봉화 축서사 주지) 등이다.

보문은 열반 뒤 자신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기지 말고,

비나 부도도 세우지 말 것을 상좌로부터 다짐받았다.

 

현대 한국 불교계를 이끈 성철, 청담, 향곡, 혜암, 법전, 성수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한국 불교를 살려보자고 모여 정진한 ‘봉암사 결사’에서

법거량과 투표를 거쳐 선방 죽비를 잡는 입승으로 뽑힌 이가 보문이었다.

보문이 생전에 한암, 만공과 함께 ‘3대 명승’으로 불리고,

훗날 종정을 지낸 설석우 선사는 “언행이 일치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했음에도

세속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전설이 된 것은 그가 불과 50살에 열반해버린 탓도 있지만,

세속에 드러나기를 털 끝 만큼도 원치 않은 때문이었다.

 

보문 선사에 대한 무관 스님의 증언이다.

보문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큰며느리와 동시에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천으로 배를 칭칭 동여맨 채 임신 사실을 감춘 어머니는 보리밭에서 보문을 낳은 채 그대로 버려두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큰며느리가 3일 만에 보문을 보리밭에서 찾아내 자기 친정집으로 보내 키우게 했다.

 

보문은 청년이 돼 집으로 돌아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가출했다.

부산 항 하역장에서 십장으로 일하던 보문은

한국인들의 노임을 착취해 자기 배만 불리던 업자에게 찾아가

단도를 들이대고 돈을 빼앗아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고 도망쳤다.

그는 독립 운동을 위해 만주로 가던 차 마지막으로 금강산 구경이나 하고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불법을 만나고, 스승 한암을 찾아 오대산에서 견성한 것이다.

그는 1년 반 뒤 오대산을 떠나 세상으로 흘러 들어갔다.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가는 곳마다 똥지게를 마다하지 않고 일했고,

평생 누더기 한 벌과 바리떼 하나로 살아갔으며,

한국전쟁 때는 고아들을 돌보고,

늘 탁발을 해 한 바리떼는 뒤따르는 걸인들에게 나눠주고

한 바리떼는 절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보문은 폐병이 들어 갈비뼈가 썩자 마취를 하지 않은 채 수술을 받았다.

칼로 맨살을 개복하고 갈비뼈 세 개를 도려냈다.

그는 세 번째 갈비뼈를 도려낼 때 ‘으음’하고 신음 소리를 한 차례 냈을 뿐이라고 한다.

‘아야’하는 아픔과 ‘으음’하는 신음은 어느 당체의 발설인가.

‘이뭐꼬’ 화두를 들고 밤을 지샌 수행 학림 참여자들 앞에 어둠이 사라졌다.

밝아지니 문수의 당체가 천지에 드러난다.

오대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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