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경허선사

敎當 2013. 7. 2. 11:58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아침 동학사 오르는 길엔 매서운 바람이 마중한다.

칼바람에 낙엽이 허공을 가르고, 나무의 잔가지는 부서져 흩어진다.

바윗장보다 두꺼운 얼음이 계곡물을 막아섰다.

산도 얼고 계곡도 얼었다.

경허(1846~1912)의 새벽 또한 이랬을 것이다.

 

9살 어린 나이에 청계사로 출가한 경허는 겨우 글만 깨친 가운데 14살에 이곳 동학사로 왔다.

당시 조선 제일의 강사로 명성을 떨치던 만화 보선으로 부터 불교와 유교 경전 등을 배워

두각을 나타낸 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강사에 추대됐다.

33살이 된 그는 청계사에서 어린 동욱(경허의 속명)을 친아버지처럼 돌봐주다가

환속한 옛 스승 계허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그는 조선 제일의 강사로 어엿이 출세한 자신의 떳떳함을 내보이며

스승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서울로 향하던 경허는 천안을 지나며 매서운 비바람을 만나 한 마을로 피해 들어갔다.

그러나 어느 집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린 끝에 열린 한 집 주인은

“지금 이 마을엔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해 모두 죽어 시신이 지천에 깔려 있으니

전염돼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어서 멀리 달아나라”며 문을 닫았다.

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중들이 우러러보러 가운데 법상에 올라

“생과 사는 뜬구름 같은 것, 생과 사는 둘이 아니”라고 가르치던 그가 아닌가.

갑자기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로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경허의 심중이 어땠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선 제일의 불교 지식이 생사의 갈림길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호랑이를 그린 그림은 그림일 뿐 호랑이가 아니었다.

부처의 글은 불경일 뿐 부처가 아니었다.

동학사에 돌아오는 길에 그의 가슴에도 칼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동학사에 돌아온 그는

20년 동안 스승 만화 보선이 일군 강원을 스승의 진노를 뒤로 한 채 폐쇄하고,

“지금까지 내가 한 소리는 모두 헛 소리”라며 학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토굴에 들어가 문을 닫아 건 채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당나라 때 영운 지근 선사의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었다.

그는 이 의심뭉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턱 밑에 송곳을 세워놓고 정진했다.

 

50년 전부터 비구니 사찰이 된 동학사에 들어서니

옛 자취는 없고 정갈한 산사가 학처럼 사뿐히 앉아 있다.

5분 가량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실상선원이다.

경허가 용맹 정진했던 토굴이 있던 자리다.

1958년 15살의 나이로 이곳에 출가한 주지 요명 스님(61)은

“허름은 토담집이던 경허 스님의 토굴터는 신도안에서 와

상투를 틀고 도를 닦던 한 가족 4명이 살았는데,

50년대 말 절에서 돈을 주고 내보내고 그 집을 헐었다”고 전해주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실상선원이 지어져 강원 4학년인 화엄반들이 살고 있다.

생명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려던 경허의 수행처에

100여년 뒤 후학들이 생명의 이치를 밝히는 화엄학을 공부하고 있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경허는 두려움에서 넘어졌다.

어려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죽음이 두려웠고,

이를 이기기 위해 불과 9살의 나이에 출가했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사랑했던 어머니와 이별하는 것도 어린 그에겐 깊은 두려움이었다.

이런 모든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금의환향할 때

그는 한 마을에서 최근 지진과 해일의 공포에 떨던 동남아시아의 피해자들처럼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그가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두려움을 마주하며 목숨을 건 수행을 한 지 3개월 뒤 어느 날이었다.

 

사미승 동은이 이미 깨달은 바가 있는 자신의 속가 아버지 이처사가 한 말을 경허의 문 밖에서 던져 물었다.

“소가 되어도 ‘콧 구멍이 없다(무비공·無鼻孔)’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그 때 경허는 자신의 실상을 찰나에 꿰뚫어보았다.

생사의 경계는 어디던가.

들이쉰 숨을 내뱉지 못하거나 내 쉰 숨을 다시 들이쉬지 못한 순간 생사는 갈라지고 만다.

숨구멍에 생사의 갈림길이 있다.

그런데 ‘콧구멍이 없다’는 것이다.

일순간 경허의 숨이 턱 막혀 버렸을 것이다.

사미승의 질문은 오직 화두 일념이던 경허의 급소를 찔렀고,

생사경계에 선 그를 백척간두에서 밀어버린 셈이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더 이상 갈래야 갈 곳 없는 곳에서 하늘은 열렸다.

그를 극한 공포로 사로잡은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이 문이었는데,

그것이 해탈의 단초가 된 것이다.

숨구멍이 사라져 숨조차 쉴 수 없는 곳에서 그는 허당에 빠지듯 한 생각을 여읜 순간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본성품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법명은 성우(性牛).

드디어 애타게 소를 찾던 그가 원래부터 ‘본성품의 소’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동학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니

경허를 대신해 계룡산이 생멸과 생사가 둘이 아닌 이치를 일러준다.

이 칼바람이 바로 봄이 오는 소리며,

저 계곡의 얼음이 바로 시원한 봄날 시냇물이 아닌가.

 

요명 스님이 일찍이 노스님들로부터 전해 듣던 경허의 기행담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경허는 동학사 앞 산을 넘어 한 시간 반 거리인 신도안 장터에 가서

술을 동이째 털어놓고 얼굴을 붉게 단청한 뒤 지나가는 아녀자의 입술을 덮치곤 했다.

요즘도 몰매를 맞아 쌀 그런 행실을 조선시대에 했으니

그런 기행이 가져올 파장과 비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비방에도 칭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녀자를 희롱하다 죽도록 얻어맞다가 누가 말리면 말린 사람을 향해

“미친 놈아, 왜 남의 일을 방해하느냐”며 호령하던 그였다.

그는 개 돼지처럼 진흙밭에 구르면서도 진흙에 물들지 않는 한떨기 연꽃이었다.

동학사강원 학장 일초 스님(61)은 이에 대해

“역경계(좋지 않은 일)를 행하면서

거기에 마음이 끄달리거나 흔들리지 않는가를 보는 의도된 행동”이라고 해석했다.

 

조선제일의 강사가 한갓 종이호랑이였음을 익히 경험한 그는

깨달은 뒤에도 그처럼 자신을 철저히 검증했다.

배불정책으로 조선 중기 이후 선맥마저 끊겨버려 검증받을 스승하나 없던 세상에서

그는 그렇게 한국 근대 선의 첫새벽을 열었다.

 

이 무비공(無鼻孔)에 관한 얘기는 다른 얘기도 전해진다.

사미승이 모여 스님이 게으름을 피면 죽어서 소가된다는말을 화제로 삼아

소가되면 코뚜레를 꿰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는 말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곁을 지나가던 거사가

그러면 콧구멍 없이 소로 태어나면 될거 아니냐고 하며 지나간다.

이 소리를 들은 경허선사사 크게 깨쳤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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