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혜월선사

敎當 2013. 5. 23. 19:58

 

 

충남 예산 덕숭산 정상 부근.

세상 천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덕숭산 정혜사에 한 밤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쌀가마를 훔쳐내 지게에 지고 있었다.

쌀가마가 너무 무거웠던지 도둑은 일어서지 못해 쩔쩔맸다.

그 때 누군가 지게를 살짝 밀어주는 것이 아닌가.

도둑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는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쉿! 들킬라.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가게. 그리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또 오게나.”

 

혜월 선사(1862~1936)였다.

11살에 이곳 정혜사에 출가해 19살에 경허선사를 만나 24살에 깨달음을 얻고서도

끼니도 잇기 어려운 절 대중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논을 개간하고, 밭을 갈고, 소를 키우던 그였다.

“절에 먹을 것이 없는데도 도둑이 들면 도둑을 기는 커녕

절 살림을 훔쳐내 도둑에게 지워 보낸 어른이었지.

도둑에게 참 잘혔어. 잘혔어.”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은 혜월을 기리며 수덕사 염화실에서 껄껄 웃었다.

혜월의 사제이자 그가 시봉했던 만공 선사 등으로 부터 어린 시절 늘 듣던 얘기들이다.

혜월은 몸을 숨긴 채 북녘땅 갑산에서 열반한 스승 경허의 시신을 만공과 함께 모셔와

다비를 치르고서는 홀연히 덕숭산을 떠났다.

51살이었다.

 

 

부산시 부산진구 부암동 백양산 선암사.

625년 원효대사가 세운 조그만 절에 훗날 혜월이 찾아왔다.

그러자 수행을 하려는 납자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었지만 사형 수월선사와 마찬가지로 밤낮으로 머슴처럼 일했다.

그는 덕숭산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소를 키웠다.

혜월은 사람에게 대하는 것과 다름 없이 소 ‘얼룩이’를 대했다.

 

어느 날 선암사에도 도둑이 들었다.

새벽에 보니 혜월이 그토록 아끼던 소가 사라진 것이다.

승려들은 난리법석이었지만 혜월은 조용히 뒷짐을 지고 뒷산을 올랐다.

그리고선 “얼룩아!”하고 불렀다.

그러자 도둑에게 끌려가던 소가 “음메”하고 응답했다.

소는 혜월의 부름에 울음으로 응답할 뿐

아무리 도둑이 때려도 뒤를 돌아보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울음 소리를 좇아 간 승려들이 도둑을 잡아 와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혜월은 “소를 찾았으면 됐지 사람은 왜 때리느냐”며

도둑을 일으켜 세워 쓸어주며 내려가도록 했다.

 

혜월은 까막눈으로 알려져왔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다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를 통해 혜월의 글씨가 전해지고 있으므로 알려진 대로 까막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초발심자경문(막 출가한 승려가 읽는 경전)을 겨우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혜월은 이미 주인과 도둑, 사람과 짐승의 경계도 차별도 없었다.

무차별과 무등, 무소유. 그것이 천진도인 혜월의 안목이었다.

 

조계종 총무원 포교원장을 지냈던 내원정사 주지 정련 스님은

혜월의 법제자인 석호 스님의 제자 석암 스님을 은사로

1957년 이곳 선암사에 출가했다.

혜월이 열반한 지 20년이 넘은 뒤였지만

향곡·석암·동춘 스님 등 혜월의 선을 이은 스님들이 주지로 머물며

소림선방을 운영해 지월·서옹·석주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흐트러짐 없이 정진하는 모습을 보며 환희심을 내곤 했다.

중증장애인시설 반야원을 만들어 대중의 보시를 자비로 환원하는 그의 지표가 된 것은

당시부터 귀가 닳도록 듣던 혜월의 삶이었다.

 

혜월은 절 대중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가는 곳마다 산비탈을 개간해 논을 만들었기 때문에 ‘개간 선사’로 불렸다.

그가 밤낮으로 몇 년을 일해 산비탈에 논 10마지기를 개간했다.

산이 가팔라서 논이 거의 없던 아랫마을의 한 사람은 이 논을 탐냈다.

“많은 식구들을 먹여살려야하니 그 논을 팔아라”라고 사정하는 소리를 들은 혜월은 논을 팔았다.

그런데 혜월이 원주(절 살림을 맡은 승려)에게 내놓은 돈은 논 여섯 마지기 값에 불과했다.

마을 사람이 순진무구한 혜월을 속인 것이다.

절 대중들은 그 논 열 마지기를 만들기 위해 고생한 일을 생각하며

분을 이기지 못하며 혜월을 탓했다.

그러자 혜월은 대중공사(전체회의)에서

“논 열 마지기는 저기 그대로 있고, 여기에 여섯 마지기 값까지 생겼으니, 더 번 것이 아니냐”고 했다.

 

경허 선사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을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혜월과 제자들이 개간했던 땅엔 이제 모조리 아파트가 지어졌거나 지어지고 있다.

선암사는 80억여 원의 보상금이 적다며 위헌 소송까지 제기하며 140여 억 원을 받아냈다.

그러나 종단 재산을 팔면 20%를 종단에 내야하는 규정보다 적은 돈만을 내놓아

주지는 멸빈(승적 박탈)되고, 그 주지는 종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었다.

재산권을 둘러싸고 분쟁 중인 조계종의 대표적인 사찰이 되었던 것이다.

 

선암사를 뒤로하니

다만 개간하되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천지가 내 집인 듯 자유로웠던

천진도인 혜월의 할(외침)과 방(주장자)이

탐욕에 물든 세속인의 가슴을 친다.

땅은 누구의 것인가.

무엇이 진정한 소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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