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상원사 한암 선사

敎當 2013. 3. 11. 17:34

 

 

△ 한암 선사가 한국전쟁 때 군군의 방화에 맞서 지켜냈던

    상원사 문수전 뒤로 눈쌓인 오대산이 펼쳐져 있다.

 

아궁이불 때다 8만4천 번뇌 ‘전소’

세속과 탈속의 경계일까.

맨몸을 드러낸 산천이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 접어들자 설경으로 바뀐다.

온통 하얗다.

하늘은 안과 밖이 없지만 오대산 안팎의 산천은 경계가 엄연하다.

오대산 본찰인 월정사에서 차로 30분가량을 오르니 상원사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인 한암 선사(1876~1951)가 1926년 당시

깊은 산골이던 이곳에 들어가 열반할 때까지 머문 곳이다.

 

서울 강남 봉은사 조실이던 한암은

일본 불교와 통합을 꾀하던 친일 승려가 도움을 요구하자

“차라리 천년 동안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백년 동안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에 들어갔다.

한암은 그 뒤 열반 때까지 26년 동안 한번도 산문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21살 때 금강산에서 출가한 한암은 대도인 경허 선사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헤맨 끝에

23살 때 경북 금릉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를 친견한다.

경허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금강경〉 한 구절로 아직 외형만을 향하던 청년 한암의 심안을 열어주었다.

 

한암은 근대 한국 불교에서 가장 승려다운 승려로 첫손에 꼽힌다.

그만큼 일상사에서 그의 삶은 털끝만큼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런 삶의 자세는 스승 경허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경허는 바람이었다.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한암도 4개월이나 그의 뒤를 좇아 이 절 저 절을 다닌 끝에야 경허를 만날 수 있었다.

경허는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말년에 홀연히 함경도 삼수갑산에 머리를 기르고 숨어든 그를

애제자 수월이 찾아왔을 때도 방문을 열지 않은 채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돌려보낸 경허가 아니던가.

그런 경허가 한암에게만 예외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도암과 해인사에서 1년을 함께한 뒤 경허는 한암과 헤어짐을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의 성행은 진실하고 곧았으며 학문은 고명했다.

함께 추운 겨울을 서로 세상 만난 듯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을 하게 되니,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 하지 않았던가.

슬프다. 그윽한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이 되랴!”

그러나 한암은 오히려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 있는데, 뜬구름 같은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어라’라는

시로 화답한 채 스승을 좇지 않았다.

경허와 한암은 그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한암은 경허의 천거로 불과 29살의 나이에 통도사 내원선원 조실로 추대됐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을 자각하던 그는 평양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정진하던 중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8만4천 번뇌 망상을 찰나에 연소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6살.

그러나 이 깨달음조차 인증해줄 스승 경허가 이미 없음을 슬퍼하고 탄식했다.

 

△ 앉은 채로 열반한 모습

 

한암은 훗날 사형 만공이 주도한 〈선사 경허 화상 행장〉을 쓰면서

“오호라! 슬프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함은 실로 만겁에 만나기 어렵다”고 한탄하면서도

“당신의 본분사는 허물이 없으나 뒷사람이 (행동을) 배울까 두렵다”고 염려했다.

한암의 행장과 일화를 정리 중인 월정사 주지 정렴 스님은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 판단해 (경허의) 겉모습만을 따름으로써

한국 불교에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암은 법랍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세랍으로도 여섯 살 연상이던

사형 만공 선사가 1946년 입적했을 때 문상하지 않았다.

너와 나, 아름답고 추악함의 경계를 넘은 그들의 견처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후학들이 술과 고기를 먹고 기생집에 드나드는 행실을 미화하고 본받는 것을 차단해

청정 승가의 전통을 세우기 위한 결단이었다.

 

한암은 온종일 좌선하면서도 다리를 펴는 법조차 없었다.

그는 어떤 경계에서도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오대산 상공에서 수없이 총탄이 날아들어

대중들이 혼비백산해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도 어느 날 두 승려가 술의 절집 은어인 ‘반야탕’을 마시고 돌아오자

직접 회초리를 들어 무섭게 내리쳤다.

당시 월정사 주지인 지암 이종욱은 조계종 행정수반인 종무원장이었다.

그가 출타했다가 돌아오면 오대산의 승려들이 산문 밖까지 나가

고을 원님처럼 가마에 태워 모셔오곤 했다.

어느 날 노승 한암이 주지를 마중하는 대중들과 함께 산문 밖으로 나왔다.

주지가 황송해 “큰스님께서 어인 일이냐”고 묻자

“이 늙은이도 대중의 일원이니 함께 마중 나온 것”이라고 답했다.

주지가 그 뒤 다시 가마에 오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꾸중하지 않고도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게 한 것이다.

 

한암은 15일 동안 곡기를 끊으며 좌선하다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

열반을 미화하기 위해 일부러 좌탈열반을 조작하는 일까지 생기는 세태 속에서도

그의 삶을 지켜본 선승들은 그의 좌탈열반에 대해서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흐트러지는 삶의 자세를 곧추세우는 한암의 서릿발이 매섭지 않은가.

적멸보궁에서 몰아치는 칼바람이 서릿발처럼 살을 에며 미망을 베고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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