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덕숭산 만공선사

敎當 2013. 5. 9. 18:37

 

 

새벽종소리 타고 ‘無’ 의 화답이

아름다운 숲길이다.

적송이 신장처럼 서 있는 길의 풍경은 가히 비길 데가 없을 정도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봉곡사 들어가는 길이다.

100년 전 이곳을 걸어 들어갔던 젊은 승려 만공(1870~1946)도 이처럼 빼어났다.

 

근대 한국불교 선풍 탯자리

사자 새끼를 기를 때는 강아지를 키울 때와 달라야 한다고 했던가.

스승 경허는 13살에 서산 천장암에 온 만공을

10년이나 부엌데기로 부려먹기만 할 뿐 화두 하나 주지 않았다.

이 무렵 만공은 이른바 ‘타심통’이 열려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알게 돼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경허는 “그것은 술법이지, 도가 아니다”며 신통을 금했다.

수월과 혜월같은 사형처럼 도를 깨친 것도 아니요,

신통조차 못 부리게 하니 혈기왕성한 만공의 가슴이 터지기 일보직전이던 어느 날이었다.

천장암에 들른 한 어린 승려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은 어디인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처음 듣는 화두에 만공은 앞이 캄캄해졌다.

이 물음에 꽉 막힌 만공이 천장암을 무작정 빠져나와 찾은 곳이

‘봉황의 머리’ 형상 아래 지어진 봉곡사였다.

이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한 지 2년이 지난 1895년 7월25일.

면벽 좌선 중 무념 상태에서 벽이 사라지고 허공법계가 드러나는 체험에 이르렀다.

이어 새벽녘에 종성 게송(종을 치면서 읊는 경전) 가운데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보라.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라는 귀절을 외던 중

홀연히 의심 덩어리가 해소됐다.

 

산책 중인 봉곡사의 비구니 주지 묘각 스님 앞쪽의 야트막한 동산에

‘세계일화’(世界一花: 우주는 한 송이 꽃)라는 탑이 세워져 있다.

만공 스님이 늘 하던 법어다.

1969년 이 절에 온 묘각 스님이 86년 만공 스님을 기려 세운 탑이다.

‘세계일화’는 만공의 손상좌로 최근 열반한 숭산(만공의 법제자인 고봉 선사의 제자) 선사가

서구에 선을 전하면서 가장 즐겨 쓰던 말이기도 하다.

 

친구 김좌진과 팔씨름 승부 못내

그러나 만공은 공주 마곡사 토굴에서 3년 동안 보임했으나

경허는 새끼사자를 벼랑 끝에서 밀어버리듯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며 다시 경책한다.

스승이 준 ‘무’(無)자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 중

1901년 경남 양산 영축산의 흰구름 떠도는 외딴 암자 백운암에 이르렀다.

장마를 만나 보름 동안 꼼짝 못한 채 참선만 하던 어느날 새벽 종소리를 듣는 순간

상대 세계가 무너지고 마침내 우주의 본심이 드러났다.

31살 때였다.

그 뒤 충남 예산 덕숭산 정상 부근 정혜사에 금선대를 지어 수덕사, 견성암 등을 일으키니

이로써 덕숭문중이 태동했고, 근대 한국불교의 선풍이 여기서 일어났다.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은 출가한 12살 때부터

만공 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그를 시봉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다.

만공은 인근 홍성이 고향인 청년 김좌진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했다.

김좌진은 젊은 시절부터 천하장사였다.

만공 또한 원담 스님이 “조선 팔도에서 힘으로도 우리 스님을 당할 자가 없었지”라고 할 정도였다.

둘이 만나면 떨어질 줄 몰라.

어린 아이들처럼 ‘야, 자’하곤 했어.

앞에 놓인 교자상을 김 장군이 앉은 채로 뛰어넘으면 스님도 그렇게 했지.

언젠가는 둘이 팔씨름을 붙었는데, 끝내 승부가 나지 않더라고.

 

김좌진은 훗날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만공 또한 출가한 몸이었지만 서산 앞바다 간월도에 간월암을 복원해

애제자 벽초와 원담으로 하여금 해방 직전 1천일 동안

조국 광복을 위한 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이에 앞서 일제의 힘 앞에 굴종을 강요받던 1937년 3월11일

만공은 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마곡사 주지로 참석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사 가풍의 기개를 보여준 바 있었다.

총독 미나미가 사찰령을 제정해 승려의 취처(아내를 둠)를 허용하는 등

한국 불교를 왜색화한 전 총독 데라우치를 칭송했다.

이때 만공은 탁자를 내려치고 벌떡 일어나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전 총독은 지금 죽어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요.

그를 구하고 조선 불교를 진흥하는 길은

총독부가 조선 불교를 간섭하지 말고 조선승려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일갈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조선불교 간섭 말라’ 일제에 호통

이날 밤 만공이 안국동 선학원에 가자 만해 한용운은 기뻐서 맨발로 뛰쳐나오며

“사자후에 여우 새끼들의 간담이 서늘하였겠소. 할도 좋지만 한 방을 먹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소”했다.

이에 만공은 “사자는 포효만으로도 백수를 능히 제압하는 법”이라며 껄껄 웃었다.

만공이 머물던 덕숭산 금선대에 올랐다.

방안엔 스승 경허와 사형 수월, 혜월과 나란히 만공의 진영이 놓여 있다.

산마루에서 시린 바람이 산하대지에 휘몰아친다.

기개를 일깨우려 토하는 만공의 사자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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