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육조단경

육조단경(6)

敎當 2010. 6. 22. 11:30

 

16. 根機 - 근기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法界)에 들고자 하고, 반야삼매(般若三昧)에 들고자 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삼매에 들어가느니라.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갖추어 설명하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서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나지 않나니, 무엇 때문인가?

비유하면 마치 큰 용이 큰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염부제(閻浮提)에 비가 내리면 풀잎이 떠다니듯 하고,

만약 큰비가 큰 바다에 내리면 불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의 사람은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고 안다.

그러므로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서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비유컨대,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과 모든 유정과 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그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 바다에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것과 같나니,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 이 가르침(頓敎)을 들으면

마치 근성이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나니,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또한 차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삿된 소견(邪見)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이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頓敎)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正見)를 일으키면

번뇌, 진로(塵勞)의 중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치느니라.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물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곧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나니,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17. 見性 - 견성

 

"모든 경서(經書) 및 문자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과 십이부(十二部)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내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람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眞如)의 본성(本性)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18. 頓悟 - 단박에 깨침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弘忍)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자 말끝(言下)에 크게 깨쳐

진여(眞如)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느니라(頓見眞如本性).

이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菩提)를 단박에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頓悟) 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이며 큰 인연(因緣)이다.

이는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나느니라.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만약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느니라.

 

만약 자기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의 관조(觀照)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다.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無念)이니라.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六賊)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나가게 하나

육진(六塵)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인 무념행(無念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邊見)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頓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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