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이야기/사는이야기

사주후애(愛)를 보고

敎當 2009. 9. 11. 09:17

언제 부터인가 사랑과 전쟁을 즐겨보고 있었다.

사랑과 전쟁

전혀 어울릴것 같지 않은 이 말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전쟁을 치르듯 아옹다옹 하는 모습을 보며

목에 핏대를 새우면서 나도 어느 편인가에 서있었다.

그것이 마치 자기의 이야기인 것처럼

때론 분노하고 때론 동정하며

상대편에 서있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향하여

육두문자로 난도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내 생활의 정리와 더불어 그 드라마도 내 마음속에서 막을 내렸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예전에 비해 한층 향상된 드라마로 다가온 것이

「사주후애」라는 드라마다.

예전의 사랑과 전쟁이 흥미위주의 재연 드라마라면

이 사주후에는 실제 상황을 당사자들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훨씬 사실적이고 보는 이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사랑과 전쟁이 현실감 있는 소재를 다루다가 소재가 고갈되면서

다소 현실감이 떨어지는

조금은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드라마로 전락한 반면

이 사주후에는 사실적 드라마라 그런지 몰라도

도저히 화해와 용서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결론은 화해의 정수를 보여 준다.

물론 화해의 성립이 불가능한 부부는 방영에서 제외되어 그런지는 몰라도

도저히 극복되어질 것 같지 않은 부부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서로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슴이 터져라 흥분이 된다.

(이럴 때 예전 반공영화는 박수를 열열이 쳤는데.......후후후)

예전의 내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화해가 가능했을까?

이 물음에 나를 합리화 하는 핑계가 스물 스물 피어오른다.

그러면서 이런 자막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절! 대! 불! 가!」

그럼 지금은?

이게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상처가 아문 것도 같은데

아직까지도 이해는 되지만 완전한 용서는 안된것 같다.

하긴 완전한 용서가 된다면

이미 성불했기에 주불이나 협신불은 되어서

세상사 발치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 먼지 수북이 뒤집어쓰고 있는 과거의 신문처럼 잊고 지내다가도

우연히 그 날의 신문이 펼쳐진다면 팽팽히 되살아나는 기억들!

하지만 그것은 이젠 자그마한 상처일 뿐이고

도데체 이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그 매듭을 풀기엔 너무 복잡하고 난해 하다.

풀지 말고 자르라 하지만 그게 그리 녹녹치 만은 않다.

제길~~~헐!

사주후(四週後)에 참 사랑을 깨닫고 새로 시작하는 저 부부들처럼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할 때인 것 같다.

사주후애(死酒後愛-죽은 후에도 술을 사랑한다)도 아니고

사주후애(四柱後愛-사주가 말년에는 세상을 사랑하면서 사는)가

되었으면 하고 바래 본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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