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불교경전 이야기

십이연기법(2)

敎當 2008. 5. 22. 08:39
 

부처님께서 육년 고행을 마치고 다시 명상에 들어 갔을때 그 명상 내용이 바로 12연기법 입니다.

인간의 生老病死가 출가의 동기였다면 십이인연은 生死解脫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이 연기법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서 접할수 있는데 잡아함경 권 12에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였고

중아함경 권47에서는 “이것으로 인하여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나므로 저것이 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고 하였으며

상웅부경 12에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해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서 저것도 멸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경전에 나오는 기록들은 약간의 단어적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문구들중 우리가 연기라고 정의하는 부분은 앞에 나오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연기를 정의하는 문구 즉“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언뜻 생각하면 그 두 문구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문구 속에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이 이미 내재되어 있으므로 이 문구는 결국 현상계 만유(萬有)의 공간적인 상의성(相依性) 관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 난다”는 문구 속에는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것이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결국 현상계 만유의 시간적인 상의성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 갖고있는 의미는 각기 다른 두 가지가 각기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에 상의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는 것인만큼

만유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각기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서로 인연(因)이 되고 연(緣)이 되어서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 그 어느것 하나 독립되어 존재할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상의 관계를 가지고 인연생기 한다는 이 연기법이야 말로 고금의 영원한 진리라고 할 것입니다.

십이 인연법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태어나서 일어나는 과정과 살다가 죽고, 죽은 후의 상태를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은 열두 단계로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는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상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無明과 行의 두가지는 과거이인(過去二因)이 됩니다.

그 원인에 의해 識과 名色과 六入과 觸과 受의 다섯가지가 생겨 납니다.

이 다섯가지를 현재오과(現在五果)라 합니다.

즉 전생의 두가지 원인에 의해 현생의 다섯가지 결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愛 取 有의 세가지는 현재삼인(現在三因)이 됩니다.

현생의 이 세가지가 씨앗이 되어 미래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生과 老死입니다.

죽음 후에는 육신은 地 水 火 風의 사대로 변하고 영혼만이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전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깊은 잠과 형태가 유사 합니다.

영혼은 깊은 잠속에 있다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 합니다.

팔식에 잠재되어 있는 무명이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연있는 곳을 �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業識이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윤회를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살아있는 동안 어떤 한곳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영혼만 남게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물질화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愛 取 有의 업을 잘 지어야 합니다.

생선을 싼 종이는 생선이 없어져도 오랬동안 비린내를 풍기게 되지만 반대로 향을 쌓던 종이는 끝끝내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 가지로자기 자신의 인연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은 달라지게 되는 것 입니다.

둥근 고리모양의 순환 관계를 가진 십이 인연은 그 어떤 것도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無明이 �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老死가 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불교에서 근본적으로 나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언제든지 자기가 마음 먹은 그 순간이 시작입니다.

시작과 끝이 분명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제 자기가 행한 업은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시작하는 그 순간이 곧 출발점 입니다.

나이를 탓하여 나태하거나 포기하려는 사람은 불교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우리의 인생이 일직선으로 시작과 끝이 분명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둥근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끝낼 수도 없고 머물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이치를 안다면 아는 그 순간부터 계속 자기 발전을 위해 정진 할 것입니다.

보다 나은 꿈과 희망과 기대와 포부를 갖고 활기차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불교를 배우는 보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그러한 십이 인연도 모두 텅 빈 것으로 보아 無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텅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없기도 하며 있기도 한 것입니다.

있다는 것은 인연에 의해 잠간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없기도 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無는 있다는 것의 不正이며 없다는 것의 부정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결국 십이인연에 매달려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이인연이 텅비어 無의 상태가 되는 것까지 깨달아야 확연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