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청담스님의 딸

敎當 2020. 4. 10. 15:29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에 성철 스님은 경북 문경의 대승사에서 수행 중이었다.

당시 성철 스님과 함께 수행하던 분은 수덕사의 말사인 정혜사에서 만난 청담(靑潭) 스님이었다.

 

그리고 그 청담 스님의 딸이 지금 경기도 수원 봉녕사의 승가대학 학장인 묘엄(妙嚴) 스님이다.

 

묘엄 스님은 해방되던 그 해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친구인 성철 스님의 권유로 출가했다.

성철 스님 입적후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묘엄 스님을 찾아가 출가의 인연에 대해 들었다.

묘엄 스님의 회고담.

 

묘엄 스님이 열 서너살 때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출가한 아버지에게 다녀오라며 편지를 주었다.

어머니는 "중학교 진학시험 준비를 위해 한 1년간 산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라" 고 말했다.

어린 소녀는 진주에 사는 친척과 함께 대승사로 찾아갔다.

청담 스님에게 어머니의 편지를 전했다.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그 편지를 청담 스님께 드렸지요.

청담 스님이 그 편지를 보고는 아무 말이 없더라구요.

나중에 알고보니 편지에는 '어떻게든 이 아이를 중으로 만들어 달라'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 적혀 있었던 거예요.

조금 있다 성철 스님이 나타났습니다. "

 

성철 스님이 친구의 어린 딸을 앞에 앉히고 말했다.

 

"너거 아부지하고 나 하고는 물을 부어도 안새는 사이다. 그러니 니도 나를 믿거라. "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믿으라는 말부터 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도 스님에게 못믿겠다는 얘기는 못하고 "살아보면서, 겪어 봐 가면서 천천히 믿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성철스님이 되물었다.

 

"와 바로 못믿는다 말이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아버지도 못 믿는데......."

 

당돌한 말에 성철 스님이 껄껄 웃는다.

그리곤 어린 소녀에게 불교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기 위해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 때는 그냥 옛날 얘기 듣는 기분으로 들었지요.

그런데 지금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주로 인생무상(人生無常) 에 대해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쉽게 풀어 얘기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예컨대 '출가' 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부처님 얘기를 해주는 겁니다.

부처님도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서 한때는 호사스런 생활을 했지만,

그런 화려함을 전부 다 버리고 영원한 즐거움을 위해 출가했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그리고는 그 얘기를 현실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스님들도 세속에 있으면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하고 사장도 하고 그러겠지만

그런 것 다 버리고 출가하는 이유는 부처님이 출가하신 이유와 같다는 것이지요. "

 

어린 묘엄 스님이 듣기에 처음에는 참 이상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국회의원이니, 사장이니 하는 자리가 스님들보다 훨씬 높고 좋은 것 같은데........

 

그런 좋은 기회를 버리고

별 볼 일 없는 중이 된 사람이 높은 지위를 "별 것 아니라" 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불교의 기본 철학을 옛 얘기처럼 며칠 듣고난 어느날

성철 스님이 묘엄 스님에게 내기를 걸어왔다.

 

"니하고 나하고 말로 주고받기 시합하자. 내가 이기면 니가 중이 되고, 니가 이기면 중 안 되는 걸로 하자. "

 

순간 지난 며칠간 들었던 얘기들이 휙 묘엄 스님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서고금을 오가는 장황한 얘기를 해준 성철 스님을 지식이나 말솜씨로 따라갈 수 없다는 판단이 먼저 섰다.

그러면서 성철 스님의 얘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성철 스님에게 거꾸로 대안을 제시했다.

 

"스님이 아시는 것, 그걸 다 나한테 가르쳐 주신다면 중이 되겠습니다. "

 

성철 스님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냐, 그기 좋다카면 그래 하자. "

 

묘엄 스님은 그로부터 약 보름 정도 대승사에 머물면서 성철 스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해 5월 단오날 인근 윤필암에서 머리를 깍았다.


'경전 > 성철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철-청담의 의기투합  (0) 2020.07.03
'역사선생' 역할  (0) 2020.04.24
만공 스님과의 만남  (0) 2020.04.03
일타스님이 본 첫인상   (0) 2019.12.03
큰스님의 '깨달음'   (0) 2019.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