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백련암의 TV

敎當 2019. 2. 11. 10:44

1970년대말,

성철 스님을 따르는 신도들의 모임을 이끌던 회장단이 TV를 한 대 사들고 와 성철 스님 방에 놓자고 했다.

성철 스님은 당연히 반대다.

 

"나는 신문도 안 보고 라디오도 안 듣는 사람인데, 테레비는 무신 놈의 테레비고?"

 

신도들이 억지로 설득했다.

 "TV는 안 보시더라도 불교와 관련된 비디오테이프를 구해올테니

그럴 때라도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며 강권했다.

그렇게 해서 백련암에 TV가 들어왔다.

 

TV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

얼마뒤 성철 스님 심부름을 하러 서울로 갔다.

심부름을 마치고 동대문야구장 앞을 지나는데 마침 모교인 경북고가 출전하는 경기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당시 경북고는 야구를 잘 해 서울에 있는 동창들은

모교가 출전하는 게임이 있으면 우르르 야구장으로 향하곤 했다.

문득 그때 생각이 나 야구도 보고 동창도 볼 겸 입장권을 샀다.

 

예전엔 동창들과 주로 1루 쪽에서 응원을 많이 했다.

'동창들이 있으려나' 하는 생각에 1루 쪽으로 갔다.

동창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마만에 보는 야구인가.

출가해 처음 서울에 온 길이라 감개도 무량했다.

야구 경기에 몰두했다가 경기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는데 동창 몇몇의 얼굴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니 "중도 야구 구경 다 오나?" 며 놀려대면서도 반가워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옛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겁게 보내고 백련암으로 돌아왔다.

걸망을 풀고 다른 스님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얼굴색들이 이상했다.

어떤 스님은 히죽히죽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스님은 구름 낀 하늘처럼 어두운 얼굴이었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묘한 얼굴들이다.

그 때 한 사제(師弟.같은 스승을 둔 후배 스님) 가 다가와 "할 말이 있다" 고 조용히 말을 건네왔다.

 

"그래, 무슨 말인지 해보시오. "

 

"오늘 큰스님 뵈오면 크게 경칠 일이 생겼으니 각오를 단단히 하고 큰스님 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

 

", 또 무슨 일이 있었다고. "

 

사제를 다그치니 사건의 경위가 나왔다.

내가 서울로 심부름을 떠나고 난 뒤에 성철 스님이 사제 스님 몇을 불러 안마를 하게 했다.

 

그러면서 "너거들 심심할테니 내 안 보는 TV나 봐라" 고 하신 것이다.

성철 스님은 실제로 TV를 보지 않았다.

 

대신 상좌들이 안마를 하거나 할 경우 TV를 보게 허용했다.

마침 TV를 켜니 동대문야구장에서 고등학생들 야구하는 모습이 나왔다.

성철 스님이 물었다.

 

"저기 뭐꼬? 뭐 하는 기고?"

 

성철 스님은 야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상좌들이 "저건 야구라고 하는 운동경기인데,

요즘은 고등학생들 끼리 하는 경기가 인기 좋다" 며 한창 설명을 하던 중이었다.

 

카메라가 1루석 뒤쪽에 앉아있는 밀짚모자에 멈추었다.

점점 클로즈업,

밀집모자 주인공의 얼굴이 커지는가 했는데 바로 심부름 간 내 얼굴이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이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물었다.

 

"저놈이 와 저기 가 있노? 심부름 시켰는데,

그거나 잘 하고 저기 가 있는지 모르겠네.

그놈 참, 일 끝났으면 빨리 내려와야지 씰데 없이 저기 와 가 있노?"

 

안마를 하던 스님들이 당황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누군가 참다 못해 웃음을 터트리자 모두 한참 웃었다는 것이다.

스님들이 왜 그런 묘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됐다.

동시에 덜컥 걱정이 앞섰다.

 

"우째 하필이면 그 때 테레비 카메라에 잡혀 가지고 이런 망신을 당하나?"

 

속으로 억울한 마음에 울화도 치밀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다.

내심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성철 스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절을 하고 시키신 심부름에 대해서 먼저 보고했다.

 

보고를 하면서도 '언제 불호령이 떨어지나'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끝내 야구 이야기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이미 지난 일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는 스님의 성정을 다시 확인했다.

무사히 큰스님의 방문을 나서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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