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필요없는 딸, 불필

敎當 2018. 11. 28. 13:50

성철스님은 출가하고 얼마 지나 세속에 떨치고 온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풍문에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따님이 바로 불필(不必) 스님이다. '필요 없는 딸' 이란 법명이다.

 

불필스님은 19375월 아버지 이영주(성철스님의 속명) 와 어머니 이덕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한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수경(壽卿) 이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이 사라졌지만

당시 고향 묵곡마을은 아름다운 경호강이 끼고 돌아 마치 강물에 둘러싸인 조용한 섬 같았다고 한다.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살수 있다고 할 만큼 넉넉한 집안이었기에

일제 식민지하에도 불구하고 수경의 유년시절은 남부럽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처음 뵙기 전까지

수경에게 아버지란 그저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불필스님은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어려서 누군가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그저 동화 그림 속에서 나오는 사람인가 싶은 정도" 라 기억했다.

 

문제는 당시 낮았던 스님들의 사회적 위상이었다.

불필스님은 "보지도 못한 아버지인데, 스님이라는 게 싫었다" 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딸" 이란 소리를 듣기 싫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는 세상 등지고 가족도 버리고 산 속에서 무엇 하는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을 감추고자 했으며,

속으로 감추면 감출수록 아버지와 불교에 대한 궁금증은 새록새록 피어났다.

조숙하고 총명했던 수경은 그렇게 아무도 모를 고민이 많았다.

 

수경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 는 옛말을 인용해가며

"서울 유학을 보내달라" 고 졸라 상경,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집안 살림이 넉넉했던 가문에서는 흔히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이미 삼촌(성철스님의 동생) 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서울 초등학교의 수업은 시골 학교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어린 나이로 서울 생활 적응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아무도 몰랐기에 큰 짐을 벗은 것처럼

마음은 홀가분해 날아갈 것 같은 심정" 이었다고 한다.

 

처음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 사람은 묘엄(妙嚴.현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장) 스님이었다.

묘엄스님은 성철스님과 절친한 청담(淸潭) 스님의 딸이다.

어느날 묘엄스님이 다른 비구니 스님과 함께 수경을 찾아왔다.

 

"큰스님께서 경남 월래 묘관음사에 계시니 한번 가서 뵙도록 하자.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얼떨떨해 있는데,

서울에 같이 유학와 있던 삼촌이 "담임선생님께 스님을 찾아간다고 허락을 받고 한번 가보자" 며 나섰다.

 "평생 불러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아버지가 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 반() ,

자식을 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미움 반() "얼굴이라도 보자" 며 삼촌을 따라 나섰다.

 

삼촌을 따라가면서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미워한 아버지인데,

그래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이것도 천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기차를 타고 묘관음사에 도착하니 해질 무렵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니 누군지 모르는 무섭게 생긴 스님 한 분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스님이 바로 성철스님과 절친한 도반(道伴)인 향곡(香谷) 스님이었다.

향곡스님이 말했다.

 

"철수좌(성철스님) 가 오늘 이상한 손님이 온다더라면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수경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친혈육인 자신을 그렇게 내팽개쳐 놓은 아버지,

그래서 원망스러웠던 아버지가 애써 찾아온 딸을 피해 사라지다니.

향곡스님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는 성철스님을 찾아 나섰다.

조금 기다리자 향곡스님이

다 떨어진 누더기에 부리부리하게 광채나는 큰 눈만 보이는 스님과 함께 나타났다.

"저 분이 내 아버지인가" 하는 순간 눈 큰 스님이 소리를 질렀다.

 

"가라,!"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수경은 그 순간 "삼촌 돌아가요" 라며 돌아섰다.

그 때 무서운 얼굴의 향곡스님이 부드러운 미소로 붙잡았다.

자그마한 방으로 데려가선 과자며 과일이며 먹을 것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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