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자생활에서 가장 답답했던 점은 말상대가 없다는 것이다.
행자가 공경해야할 스님들에게 이야기를 먼저 할 수 없고,
스님들도 행자라는 존재에 관심이 없는 듯 아예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처음 절 생활을 하는 입장에선 온갖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내 입장에서 얘기를 건네기 가장 쉬운 상대는
나보다 몇달 먼저 출가한 채공(菜供.스님들이 먹을 반찬을 만드는 직책) 행자였다.
출가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친구스님도 있었지만, 그는 스님이고 나는 행자였다.
친구스님 역시 나를 불러 위로도 해 주고 모르는 것은 가르쳐 줄만도 한데 안면몰수하다시피 냉담했다.
채공은 행자중에서도 바쁜 소임이다.
반찬을 보통 서너 가지를 해야하기 때문에 식사준비 시간이 되면 칼질하랴, 불 때랴, 나물 볶으랴 참 바삐 움직였다.
그렇지만 염치 불구하고 나는 끼니 때마다 채공에게 쌓였던 질문을 퍼부어댔다.
하루는 채소를 다듬던 채공 행자가 부엌칼을 도마 위에 꽉 꽂으면서 나지막히 외쳤다.
"한번만 더 물으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
이후로 나는 채공 행자에게도 더 묻지 못했다.
성철스님의 환갑은 나를 무척 답답하게 만들었던 일로 기억된다.
나이 지긋한 여성 신도 한분이 멀리서 찾아와 성철스님을 뵙고 간 날 저녁이다.
원주스님이 테플론(teflon) 섬유로 만든 옷 한 벌씩을 스님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
광목으로 만들어 여기저기 기운 옷을 받아 입고 살면서 '절에선 모두 이런 옷만 입고 사는 것인가 보다' 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양복감으로 된 새 옷을 나누어주니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원주스님께 "왜 이런 새 옷을 주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를 더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원주스님의 대답, "옷을 주기는 줬지만 앞으로 절대 입지말라" 는 엄명이다.
다시 캐물었다. "옷을 주면서 입지말라니 도대체 무슨 영문" 이냐고. 원주스님이 귀찮아 하는 눈치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그 행자 참 질기구먼. 내일이 큰스님 환갑이라,
스님들 입으라고 신도님이 옷 해 가지고 와서 나누어 준 것이야.
그렇지만 내일 그 새 옷 입고 나가면 큰스님께서 절밖으로 쫓아낼 터이니,
내가 입으라 할 때까지 절대 입지 말란 말이야. 알겠어. "
원주스님은 몇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않는 구석이 많았다.
"내일이 큰스님 환갑이시라면 잔칫상을 준비해야 하지 않는가.
밤이 늦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서둘러야 할 터인데......
그런데 여태 환갑잔치 준비한다는 낌새조차 없는 걸 보니 내일 신도들이 한 상 잘 장만해 오는가 보다. "
다음날 아침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점심 때 신도들이 잔칫상을 만들어 오려나" 는 생각에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점심도, 저녁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렇게 성철스님의 환갑이 지나가 버렸다.
큰스님이라서 굉장한 환갑잔치가 벌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평일보다도 조용하고,
또 뭔가 조용조용 긴장해 지나는 모습이 잔치와는 영 거리가 멀었다.
성철스님의 생신은 음력 2월 19일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됐다.
성철스님은 출가이후 한번도 생일상을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을.
1950년대말 큰스님이 대구 팔공산 성전암에 머물 당시 일화가 유명하다.
몇 신도들이 큰스님 생일을 맞아 과일 등 먹거리를 한 짐 지고 성전암을 찾아와 상을 차렸다가 쫓겨났다고 한다.
성철스님은 누가 생일 얘기라도 하면 "중이 무신 생일이 있노" 라며 꾸짖곤 했다.
생일이란 속세의 일,
출가한 승려에겐 이미 끊어진 인연이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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