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행자생활 적응 '채찍'

敎當 2017. 5. 26. 13:49

"니 지금 뭐하노. "

 

성철스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저녁밥을 짓기 위해 할 줄 모르는 조리질을 하느라 샘가에서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반가운 마음에 불평겸 하소연을 했다.

 

"원주스님이 갑자기 불러내더니만, 오늘 저녁부터 공양주 노릇 하라고 해서 지금 조리질 하고 있심더. "

 

큰스님에 대한 예의는 갖추었지만 목소리엔 잔뜩 불만이 담겨 있었다.

큰스님이 새까만 행자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듯 호탕하게 웃는다.

 

"하하. 이놈아, 니도 묵고 노는 것이 중인 줄 알았제.

그게 아이고, 혼자 사는 것이 중인기라.

밥할 줄 모르고, 반찬할 줄 모르고, 빨래할 줄도 모르면 우째 혼자 살겠노.

혼자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밥하고 반찬하는 것은 지가 할 줄 알아야제.

그래서 공양주 시키는 것인데 알지도 못하고 불만만 해, 이 나쁜 놈아!"

 

웃음으로 시작된 말씀은 호통소리로 끝났다.

출가하기만 하면 방 주고, 밥 주고, 옷 주고, 그래서 자기 시간만 가지는 편안한 생활인 줄 알았는데.......

당시엔 후회스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때때로

"아무 것도 모르고 절에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절 살림살이를 시시콜콜 알았다면 내가 출가를 결심할 수 있었을까" 고 자문해 보기도 한다.

 

나는 너무 모르고 출가했다.

오로지 도를 얻겠다는 마음만으로.

더욱이 대구에서만 살아 산중의 생활방식이 전혀 몸에 맞지 않았다.

그런 나를 출가시킨 큰스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그럭저럭 공양주 생활을 익혀 가던 어느 날

원주스님이 '' 를 가지고 왔다.

키질을 해 쌀에 섞인 지푸라기와 잡동사니를 바람에 털어 내고,

잔돌을 가려내는 키질은 확실히 조리질보다 어려운 기술이다.

 

원주스님의 솜씨는 대단했다.

키에다 쌀을 붓고 휙 쳐올리면 쌀이 1m쯤 높이 공중으로 올라가면서

순식간에 지푸라기 같은 가벼운 이물질은 바람을 타고 다 달아난다.

 

그러나 나는 쌀을 10도 쳐올리지 못했다.

키질을 잘못하면 쌀이 밖으로 떨어져 키 안에 있는 쌀보다 마당에 쏟아진 쌀이 더 많았다.

그 날도 키질을 엉성하게 하다가 또 쌀을 마당에 쏟았다.

큰스님이 어느 사이에 나타나 쌀을 급히 주워 담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니도 어지간히 재주 없는 놈인갑다. 다른 행자들은 얼른얼른 배우는데, 니는 지금 열흘이 지나도 우째 그 모양이네. 헛 참.... "

 

큰스님이 혀를 차며 방으로 들어가시는데 몸 둘 곳을 찾기 힘들었다.

큰스님은 내가 모르는 사이 나를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저놈이 제대로 산중 생활에 적응이나 하는지....." 하는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나로서 가장 힘든 일은 바로 큰스님 뵙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백련암에 살게되면 언제라도 큰스님을 만나 이것 저것 궁금한 것이 있으면 수시로 여쭐 수 있을 줄 생각했었다.

그런데 행자에게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어쩌다 마당에서 큰스님을 뵈면 간단히 몇 말씀 물어볼 수는 있다.

그러나 따로 큰스님을 뵈려면 우선 시자(侍者.큰스님을 측근에서 모시는 제자) 스님을 거쳐야 한다.

 

시자스님은 "왜 스님을 뵈려하느냐, 무엇을 여쭈려 하느냐, 무슨 급한 일이냐" 등등 캐묻기 마련이다.

여기에 딱히 "이것 때문"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대기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 살다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큰스님을 찾아와

요긴하게 문답을 주고받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행자생활은 그렇게 힘든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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