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이 곰새끼야. "
"밥도둑놈, 밥값 내놔라. "
성철스님은 화가 나면 벼락같은 목소리로 '새끼' 니 '놈' 이니 하는 말을 예사로 했다.
물론 모두가 수행이 부족한 스님들을 일깨우는 사자후(獅子喉) 다.
그렇지만 출가후 20년간 스님을 모신 상좌생활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가르침에 어긋난 일이나,
마음에 차지 않은 일이 있으면 어제 온 행자나 20년 된 스님이나 구별 없이 질책했다.
스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우를 기대할 수 없다.
질책은 있어도 칭찬해 주는 법은 없었다.
야단 맞지 않으면 그것이 잘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했다.
스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바늘 세울 틈도 안 줬던 것이다.
나는 스님이 입적하시기 직전,
20년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칭찬을 받았다.
1993년 9월 21일. 성철스님의 사상을 총정리하는 '성철스님 법어집' (11권) 과 '선림고경총서' (37권) 출판작업이
10년만에 마무리돼 서울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어 10월 8, 9일 이틀간 해인사에서
'선종사(禪宗史) 에 있어서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의 위상과 의미' 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도 무사히 마쳤다.
돈오돈수란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평생 나서기를 꺼리던 스님이 강연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로 애정을 둔 행사였다.
그러나 건강이 워낙 좋지 않아 스님은 참석하지 못했다.
행사를 마치고 스님께 그간의 사정을 보고했다.
난생 처음 들어본 칭찬은 간단했다.
"수고 많았데이. "
나는 이 한마디에 스님의 열반을 예감했다.
호랑이 같던 스님이 칭찬을 다하다sl............
그로부터 보름만에 그렇게 무서운 스님이 떠났다.
스님을 보낸 심경은 은산철벽(銀山鐵壁.캄캄하고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벽) 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성철스님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출가했는데, 아직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는데 스님이 떠나고 말았다" 는 생각에
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니 전율이 느껴졌다.
성철스님 생전에 깨달음을 얻겠다는 급한 마음에 물은 적이 있다.
"화두 공부하여 도를 깨우치기가 그렇게 어려운데, 지름길로 단번에 깨칠 길은 없습니까. "
역시나 어리석은 물음이었다.
"그런 거 가르켜주는 거는, 미친 놈한테 칼 쥐어주는 거나 같은 기라. 내가 우째 그래 하겠노. 답답해도 혼자 공부를 마쳐야 하는 거다!"
당시 공부에 진전이 없는 우리들을 보고 성철스님은 얼마나 속 터져 하셨을까.
스님을 떠나보내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비로소 스님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성철스님은 내가 처음 출가하였을 때만 해도 깨달음에 대해 물으러 오는 스님들을 참 반갑게 맞이해 자세히 일러주곤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내 말 듣는 놈이 아무도 없어" 라며 가르침을 청하는 스님들을 잘 만나주지 않았다.
고희(古稀.70세) 를 넘기면서부터는 부척 '눈 푸른 납자(衲子) ' 를 기다리신듯 하다.
납자란 수도승을 말하며, '눈 푸른 납자' 란 서쪽에서 온 달마대사의 푸른 눈에서 나온 비유로 '탁월한 선승' 이란 뜻.
그러나 눈 푸른 납자는 오지 않았고, 성철스님은 깨달음의 큰 보따리를 아무에게도 전해주지 않고 떠난 셈이다.
"견지불견(見之不見) 봉지불봉(逢之不逢) 이니, 고지금지(古之今之) 회지한지(悔之恨之) 라. "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만나도 만나지 못하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다. )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추모한 비문이 어찌 이리도 내마음과 같을까.
나는 어쩌면 성철스님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20여년전 해인사로 성철스님을 찾아온 건 분명히 나였건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