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식의 마지막은 사리(舍利) ,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골(遺骨)을 수습하는 습골(拾骨)이다.
다비식 다음날 아침에 습골하는 것이 보통인데,
성철스님의 경우 혹시나 실수가 있을까 싶어 여느 때 보다 나무를 많이 쌓아서 불길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습골을 하루 늦추었다.
성철스님 떠나신 지 9일째 되는 날인 11월 12일 아침.
2박3일 동안 다비장을 지키며 밤낮으로 염불을 해온 1천여명의 사부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습골이 시작됐다.
비가 온다는 얘기가 있어 먼저 비닐로 휘장을 치고,
습골을 맡은 노스님들과 제자들만 장막안으로 들어갔다.
큰 나무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잿더미를 헤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정수리쪽의 유골에 묻은 재를 털어내자 두개골 속에 박힌 자그마한 점점의 푸른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사리가 나왔다. "
어느새 누군가 대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다비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방송용 카메라와 보도진, 염불하던 스님들까지 휘장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습골을 계속하기에 너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혹여 스님의 유골을 다칠까 걱정돼 일부만 수습하고 일단 습골을 중단하기로 했다.
항아리에 유골을 담고 다비장을 나설려는데 갑자기 옆에 서 있던 떡갈나무 잎들이 일시에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것 아닌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하며 갑자기 앙상해진 나무를 올려다 봤다.
절로 돌아와 유골 속에 박힌 사리를 수습했다.
다행이다.
뭇 세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리가 적지않게 나올 것이 분명했다.
전체를 수습한 결과 1백10여 과의 사리가 모아졌다.
통상 유골은 따로 항아리에 담아 사리탑을 만들 때 바닥에 묻고,
사리는 별도의 함에 넣어 사리탑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다.
성철스님의 경우도 유골은 항아리에 담아 해인사 입구에 있는 사리탑의 아래쪽에 묻었다.
그리고 사리 중 70~80 과는 사리탑에 안치했고,
나머지는 스님이 머물던 해인사 백련암과 지난 3월 생가터에 복원된 기념관 등
스님과 관련된 여러 곳에 분산돼 모셔지고 있다.
사리탑을 만들기에 앞서 습골이 끝난 큰스님의 사리는 일반에 공개하는 친견(親見) 법회를 갖는다.
성철스님의 사리도 11월 13일부터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매일 1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감당하기 힘들었다.
1㎞ 밖에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는데 그 누구도 새치기 않고 차례를 기다려주는 모습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신도들의 마음에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다.
친견을 마친 신도들 사이에 "3백 분 기다려서 3초만 보고 간다" 는 말이 퍼졌다.
반나절씩 기다렸다가 친견 시간은 정작 몇 초에 불과하다는 안타까움이었다.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던 한 신도가 들려준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 평생 큰스님 한번 친견하려고 벼루었는데,
삼천 배가 무서워 백련암을 찾지 못했다가 이제야 스님 뵈러 왔습니다.
사리 친견하는데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내가 죽든지 살든지 3천배하고 큰스님 살아계실 때 친견할 걸 그랬네요. "
이렇게 힘겨워 하면서도 종교를 떠나 많은 신도와 국민들이 사리친견법회에 동참해 주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드니 여기 저기서 라면이다 뭐다 해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청정도량의 수행풍토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단속할 수도 없고,
추운 날씨에 따뜻한 차 한 잔 대접하지도 못하는 처지에 말릴 수도 없었다.
나중에 "큰스님 덕에 서민들이 한 겨울 나게 되었다" 는
해인사 인근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으니 나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해 가을은 그렇게 바쁘게 지나갔다.
겨우 한 숨 돌리고 되돌아보니 성철스님과의 인연이 맺어지고 어느새 20년이 지난 게 아닌가.
이글은 성철스님의 상좌이셨던 원택스님의 회고로 중앙일보게 연재되었던 글을 옮겨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