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성철스님

사리 (舍利)

敎當 2017. 4. 19. 16:09

빈소도 채 만들기 전부터 문상객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엔 근처에 와 있던 등산객들이 문상하겠다며 모여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인근 지역 불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추모인파가 몰려들면서 "문상객이 적어 스님의 법력이나 덕에 흠이 될 일은 없을 것" 이라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지만

다른 한편에선 거꾸로 세간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세속의 가장 큰 관심사는 뭐니뭐니 해도 사리(舍利)였다.

한 시대의 선풍을 주도했던 큰스님인 만큼 사리가 나오긴 나올 텐데,

 "과연 몇 과()나 나올까" 하는 것이 세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사리란 원래 화장을 하고 나서 남는 유골을 말한다.

인도에선 부처님 이전 시대부터 덕이 높은 사람의 유골을 나눠 가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 덕을 추모하는 뜻일 것이다.

불교에선 사리가 법력의 상징인 듯 여겨진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생전에 "사리가 뭐가 중요하노" 하시곤 했다.

스님은 주변에서 사리를 지나치게 신비화하는 풍토를 꾸짖으면서

 "사리가 수행이 깊은 스님한테서 나오기는 한다만, 사리만 나오면 뭐하노.

살아서 얼매나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 사는가 카는게 중요하지,

사리가 중요한 거는 아이다" 고 가르치셨다.

그렇다고 성철스님이 사리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철스님에겐 평생 지기(知己)로 가깝게 지낸 도반(道伴)이 많지 않다.

`가야산 호랑이` 라는 별칭처럼 워낙 불법에 어긋나는 일을 못참는 불같은 성격인데다,

홀로 수행한 기간이 많은 탓이다.

몇 안되는 지기들 중 해인사 홍제암 자운큰스님이 입적했을 때 얘기다.

자운스님은 성철스님보다 20개월 먼저인 199227일 열반했다.

성철스님이 관절염 때문에 부산의 토굴에 머물고 계신 동안 먼저 떠났다.

 

당시 해인사 총무였던 나는

자운큰스님의 다비식을 마치고 수습한 20여과의 사리를 모시고 여는 <사리친견법회> 를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연락이 왔다.

스님이 사리를 보고싶어 한다고.

법회가 끝나자마자 사리를 모시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사리를 싼 보자기를 풀어 스님께 내밀었다.

한참을 보시더니 한마디 하셨다.

 

"이기 자운스님이가?"

 

해방직후인 47년 경북 문경시 봉암사에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만 살아보자" 는 결심에서

함께 수행에 들어간 이래 반평생을 같이 해온 도반.

쓸쓸한 듯, 서운한 듯,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리가 이리 마이 나왔으니, 얼매나 좋은 일이고. "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두 선승간의 오랜 인연을 알 길 없는 나는 그저 묵묵히 성철스님과 사리를 번갈아 보고 서 있었다.

 

사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셨던 큰스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과 법력의 결과로 얻어진 도반의 사리에 대해서는 "좋은 일" 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리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한평생 정진한 결과로 남겨진 사리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족으로, 당시 가장 나를 괴롭혔던 소문은 팔만대장경의 서울전시와 관련된 괴담이다.

<책의 해> 를 맞아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선보이기 위해 해인사의 대장경 경판 몇 개가 서울로 옮겨졌는데,

이를 두고 "신성한 고려대장경을 외부로 유출했기에 큰스님께서 돌아가셨다" 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실 대장경의 외부 나들이는 종종 있었다.

전시회처럼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인데,

이를 알 리 없는 세인들 사이에 괴담이 퍼진 것이다.

어이 없는 소문이지만 나로선 속앓이가 적지 않았다.

'경전 > 성철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비식  (0) 2017.04.27
속세의 관심  (0) 2017.04.25
장좌불와  (0) 2017.04.18
산은 산 물은 물  (0) 2017.04.13
가야산 해인사  (0) 2017.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