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이다.
성은 정씨. 완산주(지금의 전주)출신으로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며, 어머니는 길보랑(吉寶 )이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11세 때 사냥을 나갔다가 밭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뭇가지에 꿰었고,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하여 물속에 담가두었다.
그러나 집으로 갈 때에는 다른 길로 갔다.
이듬해 봄
다시 사냥을 갔다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그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30여마리의 개구리가 꿰미에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었다.
지난해의 일을 생각해낸 그는 잘못을 뉘우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금산사(金山寺) 순제(順濟)에게 사미계법(沙彌戒法)을 받았다.
760년(경덕왕 19) 쌀 20말을 쪄서 말려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하였으나
3년이 되도록 수기(授記)를 받지 못하자,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때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뜻을 발하여 3·7일을 기약하고 부지런히 참회하였다.
3일째가 되자 손과 발이 부러져 떨어졌고,
7일째 밤에 지장보살이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손과 발 을 고쳐주고,
가사(袈裟)와 바루(鉢盂)를 주었으므로 더욱 수도에 정진하였다.
3·7일을 채우자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도率天衆)이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때 지장보살은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보살은 제9간자(簡子)와 제8간자라고 쓰여 있는 목간(木簡)을 주었다.
미륵보살은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로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의 두 각을 비유한 것이다.
또, 제9간자는 법이(法爾)이고 제8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것으로써 과보(果報)를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가 762년 4월 27일이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교법(敎法)을 전하여 받고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서 용왕으로부터 옥과 가사를 받았고
그 용왕의 권속들의 도움으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이때부터 금산사에 머물면서 해마다 개단(開壇)하고 교화를 폈다.
그뒤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을 거쳐 강릉으로, 다시 금강산으로 옮기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금강산에 들어가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7년간 머무르면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으며,
흉년으로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발연사에서 다시 부사의방에 들렀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찾았다.
이무렵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이 속리산으로부터 찾아와 계법을 구하였다.
그들에게 의발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및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그리고 189개의 간자와 미륵의 두 간자를 전하여주면서 교법의 유포를 부탁하였다.
"제9간자는 법이이고, 제8간자는 신훈성불종자인데,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이 있을 것이니 거기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널리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을 제도하고 후세에까지 유포시키도록 하라.
속리산으로 돌아간 영심 등은 스승이 일러준 곳을 찾아
길상사(吉祥寺)를 세우고 점찰법회로써 진표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말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발연사에서 함께 도를 닦았으며,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하였다.
제자들은 시체를 옮기지 않은 채 공양하다가
해골이 흩어져 떨어지자 흙을 덮어 무덤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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