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원효(元曉,617-686)대사

敎當 2016. 1. 4. 12:02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잠을 자던 원효(元曉,617-686)대사는 심한 갈증으로 잠이 깼다.

곁에서 의상(義湘,625-702)대사의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모범생처럼 행동거지가 반듯한 의상대사는 잠자는 모습조차 단정했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 항구로 향하던 두 사람은 직산(樴山:천안)에서 밤을 맞아 무덤 속에서 눈을 붙였다.

그들은 현장(玄奘)법사가 주도하는 중국의 새로운 불교학풍을 배우고 싶어 당나라 유학을 결정했다.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이 뜨거워진 두 사람은 한시가 급했다.

편안한 잠자리를 구하기보다는 항구에 가서 배를 타는 것이 급선무였다.

더구나 이번 유학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에도 그들은 유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인 요동에서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수십 일 만에 간신히 빠져 나와 목숨은 건졌지만 당나라 유학은 좌절되었다.

 

그런 후 10년 세월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덧없는 것이 세월이었다.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몇 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원효 대사의 나이도 어느 덧 45세였다.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이까짓 무덤에서 자는 것이 문제겠는가.

더구나 수행자는 편안한 잠자리를 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컴컴한 어둠 속에서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낀 원효대사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초하루 그믐밤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은 있으나 마나였다.

원효대사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물을 찾았다.

뭔가 손에 잡혔다. 물이 담긴 바가지였다.

이곳을 지나던 사람이 버리고 간 바가지에 빗물이 고인 듯했다.

원효대사는 바가지를 들어 시원하게 물을 마셨다.

물맛이 아주 좋았다.

 

생명수를 마신 듯 갈증이 해소된 원효대사는 편안하게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원효대사 눈에 어젯밤에 물을 마셨던 바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해골바가지였다.

설마 저기에 담긴 물을 마셨단 말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다른 그릇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자신이 생명수라고 느끼며 마신 물이 시체 썩은 물이었다.

 

갑자기 속이 뒤틀린 원효대사는 심한 구토를 느꼈다.

웩웩거리며 토하는데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려쳤다.

똑같은 물인데 어젯밤에는 맛있던 물이 오늘 아침에는 역겨웠다.

이것은 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럽다고 느낀 것이 아닌가.

원효대사는 마음에 대해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탄식하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듣건대, 부처님께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하셨다.

그러니 아름다움과 나쁜 것이 나에게 있고, 진실로 물에 있지 않음을 알겠구나.”

 

이 진리를 깨치자 더 이상 당나라로 갈 필요가 없었다.

원효대사는 의상대사를 뒤로 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문무왕 원년(661)의 일이었다.

초등학생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중국의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의 종경록(宗鏡錄)에 적혀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워낙 드라마틱해서인지 중국에서도 인구에 회자되었다.

 

여러 책에 전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의상전을 비롯하여 송나라의 각범혜홍(覺範慧洪,1071-1128)이 쓴 임간록(林間錄),

원나라의 보서(普瑞)가 쓴 화엄현담회현기(華嚴懸談會玄記),

명나라의 구여직반담(瞿汝稷盤談)이 쓴 지월록(指月錄)등에 중요한 행적처럼 기록되어 있다.

 다만 송고승전에는 해골물 대신 귀신이 출현했다고 표현한 것이 다르다.

일본 가마꾸라(鎌倉)시대에 원효대사의 일생을 그림으로 그린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에도

역시 귀신들이 등장한다.

송고승전을 바탕으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원효대사는 성이 설씨(薛氏)로 동해 상주(湘州) 사람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으로 15세쯤 출가했다.

그는 낭지(郞智), 보덕(普德) 스님에게 배웠다.

항상 구리로 만든 바릿대를 치면서 대안(大安), 대안(大安)”하고 소리쳤던 대안대사도 원효대사의 스승이었다.

노비 출신으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춘 혜공(惠空)대사도, 장애인 출신이었던 사복(蛇卜)

나이를 떠나 모두 원효대사의 스승이었다.

자신보다 8세 어린 의상대사와는 평생 불법을 함께 한 도반으로 지냈다.

원효대사가 젊은 시절에 어떻게 수행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원효대사가 쓴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을 보면 그가 참된 수행자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당에 가는 것을 막아놓음이 없는데도 이곳에 가는 이가 적은 것은 삼독의 번뇌를 자기 집의 재물로 삼기 때문이고,

지옥에 오라고 유혹하지도 않는데 많은 사람이 가는 것은 네 독사와 다섯 욕망을 망령되이 마음을 보배로 삼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으로 길러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고,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백 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사대는 흩어지니, 내일 살기 기약 없고, 오늘은 이미 저녁,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리라...”

 

발심수행장은 출가수행자를 위한 필독서이다.

그런데 쉬운 문장과 교훈적인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어 재가수행자에게도 수행에 큰 도움이 된다.

당나라 유학길에서 되돌아온 원효대사는 요석(瑤石)공주를 만나 설총(薛聰)을 낳은 후 환속한다.

승복을 벗은 후부터는 자신을 소성거사(小性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부르며 대중교화를 펼친다.

소성(小性)마음이 작다는 뜻이고 복성(卜性)아래 하()자도 못된다는 뜻이니 지극히 낮은 사람을 의미한다.

파계한 스님인 만큼 걸림이 없었다.

 

그는 술집이든 기생집이든 여염집이든 산수간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다녔다.

광대, 백정, 술장사 등 누구라도 만났다.

그들 모두 불성에 있어서는 귀족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똑같은 부처였다.

원효대사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교화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시골마을을 노래하고 춤추고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까지도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쓰는 큰 박을 얻어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무애는 화엄경에서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무애는 곧 한마음(一心)’이다.

 

원효대사가 승복을 벗고 무애를 두드리며 민중을 교화한 데는 깊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불교는 왕실과 귀족들을 위해 존재했다.

일반 백성들이나 천민들은 감히 넘나볼 수 없는 귀족불교였다.

자장율사나 원광법사가 귀족불교를 지향했다면 원효대사는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불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전부 교화대상이었다.

불성에 있어서는 부처나 중생이나 한 치의 차이가 없거늘 귀족과 천민이라고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원효대사가 민중 속으로 들어간 이유였다.

 

원효대사가 처음 스님의 신분으로 일반 백성에게 다가가려해도 한계가 있었다.

원효대사 스스로가 소성거사가 되고, 복성거사가 되지 않는 한 민중교화는 불가능했다.

이에 파계라는 이름으로 환속을 했다.

천민들과 하층민들은 성스럽게 보이던 원효대사의 파계를 접하고 비로소 자신들과 같은 클래스로 인정해줬다.

그 결과 어른에서 아이까지, 높은 사람에게 낮은 사람까지 신라에서 원효대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원효대사에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는 곳이라면 세간과 출세간이 따로 없었다.

 이런 원효대사를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스님은 불기(不羈)의 자유인이라고 표현했다.

굴레가 없다는 뜻이니 매인 곳이 없다는 말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벗어버리면서까지 대중교화에 나선 원효대사야말로 진정한 보살정신의 실천자였다.

그는 불기의 자유인의 모습을 이론적으로 규명하여 이장장(二障章)을 남겼다.

그에게 이론은 항상 실천과 함께였다.

 

원효대사는 환속한 후 단지 대중교화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전법 못지않게 학문 연구에도 매진했다.

그는 환속한 몸으로 절에서 머물며 강의를 하고 저술에 집중했다.

 55세에 행명사(行名寺)에서 판비량론(判比量論)을 저술했고, 분황사에서는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다.

황룡사에서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강의했고,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

진정한 출가는 옷이 아니라 행위에 있다.

이것이 후대에 원효대사를 원효거사가 아닌 원효대사라고 부른 이유다.

 

그는 일생에 걸쳐 8015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남겼다.

소성거사 신분인 원효대사가 집필한 책들이다.

그 내용이 모두 도리에 정통하고 입신의 경지에 도달함이 문장의 전장을 영웅처럼 누비는것 같았다.

한 사람이 심원하고 깊이 있는 내용의 저서를 100권 이상 남긴 예로는

신라의 원효대사를 제외하고 지도론을 쓴 인도의 용수보살, 종경록을 쓴 중국의 영명연수 대사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원효대사의 저술은 대부분 산실되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온전히 전하는 것은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금강삼매경론, 이장의, 십문화쟁론

1317권에 불과하고 12부 안팎이 부분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원효대사의 저서에는 특히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관련 글이 가장 많다.

대승기신론은 큰 믿음을 일으키는 글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마명보살이 지었다.

수많은 경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명보살이 이 책을 지은 이유는 오로지 자비심 때문이었다.

경전 속에 법이 있더라도 중생의 마음과 행동이 다르고, 법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인연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없어도 법을 말하고 한번 척 보고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불법을 들어도 믿음을 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마명보살은 무명이라는 헛된 바람이 마음의 바다를 흔들기에 윤회에 떠돌게 된 중생들을

한없이 자비로운 큰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대승기신론을 지었다.

말하자면 대승기신론모든 경전들의 고갱이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경율론의 압축이 대승기신론이다.

글은 적되 뜻은 많은(少文多意)’ 책이다.

그런데 불교 공부가 깊지 않은 사람은 많은 뜻을 적은 글에 담은 대승기신론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친절한 안내자가 필요하다.

원효대사가 쓴 대승기신론소()별기(別記)는 전문가가 알기 쉽게 풀이한 최고의 해석서다.

즉 마명대사의 압축파일을 글은 간략하되 뜻은 풍부하게(文約義豊)’라는 원칙에 맞춰 압축풀기를 했다.

압축풀기만으로도 잘 열리지 않은 파일은 별기를 붙여 더 자세히 설명했다.

 

마명보살이 캐 낸 원석을 원효대사가 정련하여 순도 높은 금을 추출했다고나 할까.

번역본은 원순스님이 역해한 책(법공양)을 권한다.

지운스님의 유튜브 강의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그러고 보면 하나의 결과물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들어있는지 알게 되면 새삼 숙연해진다.

마명원효원순지운으로 이어지는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우리의 인식에 가 닿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밥 한 그릇이 식탁 위에 놓이기까지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마명보살은 어떤 신념이 있었기에 대승기신론을 집필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중생들이 불보살과 같은 바탕이라고 아는 데서 나오는 힘에 대해 확신했기 때문이다.

중생들과 불보살의 같은 바탕은 무엇일까?

마명보살은 그 바탕을 한마음(一心)이라고 규정했다.

우주만물의 근원이 한마음이고 그것이 바로 대승이다.

한마음 즉 대승은 중생과 부처가 모두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존재의 본질이다.

말을 하고 있는 나, 먹고 자고 웃고 우는 나는 내가 아니다.

즉 내 몸이 내가 아니라는 뜻이다.

 

먹고 자고 웃고 울 수 있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바로 나다.

그것이 한마음이다.

한마음은 모습이 없고 형체가 없이 텅 비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말에 있는 모습과 이름에 있는 모습과 마음이 인연한 모습을 여의어서

마침내 변할 것이 없고 무너뜨릴 것도 없으면 그것이 한마음이다.

한마음이 곧 진여(眞如)이다.

생멸하는 마음의 근원이 바로 진여다.

한마음은 불생불멸인데 망념에 의해 차별이 생긴다.

즉 중생심 안에는 이미 대승인 여래의 성품이 갖춰져 있는데 무명에 의해 가려져 있다.

이렇게 가려져 있는 불성을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그런데 모든 중생이 망념과 무명을 여읜다면 경계로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사라지게 되고 진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진여의 세계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두 가지 문이 있다.

하나는 진여문(眞如門)이고 다른 하나는 생멸문(生滅門)이다.

진여문은 일체의 존재가 생멸함이 없이 본래 고요한 상태를 뜻한다.

진여문을 통해 한마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마타를 수행해야 한다.

 

사마타를 지관(止觀)수행이라 한다.

생멸문은 한마음의 본체인 본각(本覺)이 무명의 작용에 따라 생멸하는 측면을 관찰하는 것이다.

생멸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위빠사나를 수행해야 한다.

위빠사나는 관관(觀觀)수행이라 한다.

사마타는 대상에 끄달리지 않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해 한마음 즉 진여에 들어갈 수 있다.

대승기신론에는

어떻게 하면 생멸문과 진여문을 통해 일심에 들어갈 수 있는 지,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 지,

수행을 하면 어떤 이익이 있는 지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해놓았다.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별기를 제대로 읽으면 어느 누구라도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야말로 경율론의 압축파일이 열리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원효대사의 학문적 관심사는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았다.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소승계통의 저술이 없는 것을 보면 주된 관심사가 대승 경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화엄학과 유식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원효대사를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증했다.

중국을 다녀온 유학승들이 종파적 성격이 강한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분열되고 대립하던 것과는 달리

원효대사는 화회(和會)와 회통(會通)을 강조했다.

십문화쟁론에서 밝힌 것처럼 갈등과 대립을 넘어선 원효대사의 화쟁주의는

중국불교와 다른 한국불교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12세기에 원효대사를 교조로 한 해동종(海東宗)이 창시된 것도

화쟁이야말로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자각이 있어서였다.

 

원효대사의 가르침과 실천은 신라사회를 넘어 중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십문화쟁론은 중국을 넘어 인도에까지 번역되어 전해졌다.

금강삼매경론은 당나라에서 소()가 논()으로 격상되었고,

대승기신론소는 해동소(海東疏)로 불리었다.

해동은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화엄경소는 중국 화엄학의 집대성자 법장(法藏)의 저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는 8세기 중반 나라(奈良)시대에 원효대사의 많은 저술이 건너갔다.

 

바다에서 솟았을까.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심하게 요동치는 푸른 파도 위에 서 있다.

불구불한 천의(天衣)가 밑으로 향할수록 옆으로 퍼져 파도와 조화를 이루면서

관음보살이 마치 바다 속에서 방금 솟구친 듯 생생하다.

먹의 농담(濃淡)에 의한 필선(筆線) 변화가 자연스럽게 표현된 작품이다.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머리카락은 양 어깨 위로 내려뜨렸다.

머리에는 보름달 같은 두광(頭光)이 눈부시다.

두광의 가운데는 색을 칠하지 않고 주변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홍운탁월(烘雲拓月)법이다.

 

달과 어둠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두광을 그린 선은 예배용 불화(佛畫)에서처럼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그리는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달이 어둠에 다가설 때 머뭇머뭇. 어둠이 달에 접근할 때 주저주저. 보름달 같은 두광의 선이 그러하다.

사랑도 배려도 누군가에게 스며들 때는 달과 어둠처럼 조심스러워야 하리라.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관세음보살은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괴로움에 빠진 중생이 아무리 많다 해도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모두 거둬 줄 것 같은 미소다.

자애로운 미소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대신했다.

 

관세음보살만큼 친숙한 이름이 또 있을까.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부른 이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인기가 많은 만큼 이름도 참 많다.

광세음(光世音), 관세음(觀世音), 관음(觀音),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자재(觀自在) 등등.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을까. 비원(悲願) 때문이다.

 

비원은 부처나 보살의 자비심에서 우러난,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이다.

법화경(法華經)』 「보문품에 보면 관세음보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世音)을 관()하고 해탈시켜 준다.’

관세음보살은 어머니 같다.

오직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이 부르면 무조건 돌아보고 손을 내미는 분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 뒤에 숨어 고개를 반쯤 내민 선재동자는 엄마 뒤에 숨은 아이 같다.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하는 비장한 수행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스러운 마음이 선재동자의 긴장된 마음을 무장해제 시켰으리라.

선재동자는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정병은 중생의 갈증을 없애주는 감로수를 담고 있다.

버들가지는 중생의 병을 치료해주고 고통을 소멸시켜 준다.

관세음보살은 정병과 버들가지로 만 중생의 갈증을 없애주고 고통을 치료해준다.

 

그림 오른쪽에는 단원(檀園)’이라고 적혀 있다.

단원은 김홍도가 1784(40) 이후부터 즐겨 쓰던 호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남해관음(南海觀音)예배용이 아니라 감상용으로 그린 작품이다.

남해관음과 비슷한 도상을 가진 감상용 불화로는 지단관월(指端觀月)이 있다.

 ‘지단관월원각경』 「청정혜보살장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경전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손가락을 매개로 가리키는 달을 보면 손가락은 궁극적으로 달이 아님을 알게 된다.

모든 부처님이 중생을 깨우치는 다양한 방편도 이처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중국고사도8첩병풍(中國故事圖8帖屛風)에 들어 있는데 관음보살이

나무가 그려진 절벽을 배경으로 보름달이 뜬 바위 위에 서 있는 그림이다.

거품을 일으키며 출렁이는 파도와 구름이 뒤섞여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역시 단원이란 관서를 쓰고 있다.

 

남해관음지단관월모두 경전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한 불화이면서 종교화라는 격식을 벗어버린 예술작품이다.

그래서 특별히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종교화라는 틀을 벗어나 감상화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말하지 않으면서 불교를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 남해관음이다.

마치 원효대사가 환속한 후 소성거사와 복성거사로 살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이것이 우리가 김홍도를 화성(畫聖)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소성거사를 원효거사가 아니라 원효대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우리나라에는 수승한 스님과 기량이 뛰어난 화가가 무척 많다.

그 중에서도 원효대사와 김홍도는 감히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분들이다.

이런 분을 두고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한다.

태산북두(泰山北斗)라고도 하고 철중쟁쟁(鐵中錚錚), 낭중지추(囊中之錐), 간세지재(間世之材)라고도 한다.

어느 경우든 드물게 뛰어난 인재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원효대사가 저술과 중생교화로 첫새벽이 되었듯 김홍도는 남해관음을 완성했다.

첫새벽을 의미하는 원효는 부처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다.

원효대사는 우리 불교사에서 첫새벽이자 영원한 새벽이다.

김홍도가 우리 회화사에서 그러하듯.....

 

그런데 제목을 왜 남해관음이라 했을까.

관세음보살이 인도 남쪽 바닷가에 있는 보타락가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재동자를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이 있는 남쪽까지 순례를 한 동자라는 뜻이다.

남해관음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남해 금산 보리암, 양양 낙산사, 여수 향일암, 강화 보문사가 모두 관음도량이다.

네 곳이 모두 바닷가에 있는 이유는 관세음보살의 거처가 남쪽 바닷가의 보타락가산이기 때문이다.

 

어찌 바닷가뿐이겠는가.

우리가 관세음보살처럼 자비를 행하고 타인의 고통을 거둬줄 때 그곳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도량이다.

이것이 원효대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한 진리다.

인도에서부터 전해진 부처님의 가르침은 천산산맥을 넘고 고비사막을 넘고 압록강을 건너

원효대사에 이르러 가장 우리다운 불교로 뿌리내렸다.

원효대사는 인도의 관세음보살, 중국의 관세음보살이 아닌 신라의 관세음보살로 살았다.

보타락가산의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신라의 관세음보살로 살았다.

우리도 원효대사의 원력을 따라 살 때 우리 동네의 관세음보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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