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혜초(慧超)스님

敎當 2015. 12. 7. 15:04

집 떠나면 고생이다.

그냥 고생이 아니라 개고생이다.

해외여행이라고 다를까.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 짐을 꾸리는 것도 잠시, 대문을 나선 순간부터 고생은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학마다 여행길에 나서는 이유는 여행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은 어디를 가더라도 교통과 숙박시설이 잘되어 있어 아무리 먼 오지라도 그다지 큰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1,400년 전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해남에서 제주 가는 배만 타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중국을 거쳐 인도, 아랍까지 다녀 온 대담한 여행승이 있었다.

혜초(慧超)스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혜초는 700년을 전후해 신라에서 태어나 16세에 구법(求法)을 위해 당나라로 갔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불승(佛僧)과 유학승들이 당나라로 떠나는 풍조가 유행처럼 번졌다.

신라승이 구법을 위해 입당한 것은 진흥왕 때의 각덕(覺德)이 효시였다.

중국의 남조 양()으로 건너간 각덕은 진흥왕 10(549)년에 양의 사신과 함께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했다.

진흥왕 26(565)에는 관명(觀明)이 진()의 사신 유사(兪思)와 함께 경론 1,700여권을 가지고 귀국한 것을 비롯해

신라가 멸망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중국을 다녀온 승려 수는 수백 명에 달한다.

그 중 일부는 혜초처럼 천축으로 갔으며 일부는 신라에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

 

당나라에 도착한 혜초는 금강지(金剛智, 671-741)와 불공(不空)을 만나 그들의 지도를 받았다.

금강지는 남천축(南天竺:인도) 출신 밀교승(密敎僧)으로

불공과 함께 스리랑카와 수마트라를 거쳐 719년에 중국 광주에 도착했다.

그 후 낙양(洛陽)과 장안에 가서 밀교를 전파했다.

혜초는 금강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인도에 대한 여행을 꿈꾸었다.

인도 여행을 꿈 꾼 사람은 혜초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인도에 가기 훨씬 이전에도 인도를 다녀온 승려들이 있었다.

6세기에는 백제의 겸익이, 7세기에는 신라의 혜업, 현조, 현각 등이 인도를 다녀왔다.

혜초도 그들처럼 중국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다.

 

혜초는 인도로 향했다.

그는 육로를 통해 인도로 향하던 기존 루트 대신 바닷길을 택했다.

그는 719년에 중국 광주(廣州)를 출발해 남해의 바닷길을 건너 동인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불교의 성지들을 참배한 후 중인도와 남인도, 서인도, 북인도 등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 후 아랍의 페르시아까지 갔다 중앙아시아의 몇몇 나라를 돌아본 후 발걸음을 돌렸다.

당나라에 돌아올 때는 해로 대신 육로를 선택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쿠차와 돈황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혜초에 앞서 아시아 대륙을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없었다.

그가 최초였다.

그의 여행 기간은 723년에서 727년까지 총 4년이었다.

 

4년이란 긴 시간동안 낯선 타국을 혼자 여행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는 문명교류사적으로 더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여행기를 쓴 것이다.

그 여행기가 바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그는 인도와 서역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여행 기간 내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여행기를 남겼다.

여행기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불교성지와 유적지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이교도들이 사는 다양한 풍습까지

각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사회 등 여러 측면들을 골고루 구명하여 서술했다.

6,400자에 달한 왕오천축국전에는

각 나라의 규모와 위치,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음식과 의상, 풍습과 언어, 종교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왕오천축국전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또한 스님이 썼다고 보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불교적인 내용 이외에도

각 지역의 풍습과 사회적인 현상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테면 중인도에서는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 있다는 등의 기록을 비롯해

카슈미르지방에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는 등 세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안타까운 것은 왕오천축국전이 완질이 아니라 일부분만이 현존한다는 점이다.

왕오천축국전1908년에 프랑스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했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 하나 현존본은 그 약본(略本)이며,

그마저도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가 전체 면모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중국에 돌아온 혜초는 733년에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로부터 밀교경전인 대교왕경(大敎王經)을 받은 후 약 8년간 그 곳에서 금강지를 모셨다.

740415일에 황제 현종(玄宗)이 천복사에 행차하자 대교왕경의 역경을 청했다.

한 달 후 역경하라는 칙령을 내려오자 향불을 사르고 번역을 시작했다.

번역은 금강지가 구연(口演)하고 혜초가

필수(筆受:불경을 한역할 때 범어에 능통한 번역가가 직역한 것을 다시 한문으로 다듬어 옮기는 것)하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다음 해(741)에 금강지가 입적하자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대교왕경의 범어 원문은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그 다음 해에 인도로 보내졌다.

스승의 입적한 후 혜초는 77310월부터 장안의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불공으로부터 다시 대교왕경을 공부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듬해에 불공마저 세상을 떠났다.

 

혜초는 불공의 유언에 따라 6대 제자 중 한 명이 되어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스승의 장례에 황제가 베풀어준 하사와 부조에 감사함을 표한 후,

스승이 세운 사원을 존속시켜줄 것을 주청하는 표문이었다.

이때부터 혜초는 밀교승으로서 여러 가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한다.

관정도량(灌頂道場)을 개최하는 데 앞장서는가 하면, 심한 가뭄에 기우제를 주관해 비가 내리는 신이(神異)를 드러냈다.

그는 780415일에 오대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95일까지 대교왕경을 다시 필수하고 서문을 쓴 후 그 해에 이곳에서 입적했다.

 

장가가는 날이다.

신랑이 혼례식을 치루기 위해 신부 집으로 향한다.

처음 가는 초행(初行)길이다.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 혼례식에 신랑 혼자 갈 수 없다.

신랑 앞뒤로 수행인이 따라 붙는다.

하인들이 호위한 가운데 신랑을 중심으로 가마를 탄 상객(上客)이 앞장서고 말을 탄 후행(後行)이 뒤따른다.

 

장가가고에서는 가마 탄 상객은 보이지 않는다.

상객은 신랑집을 대표하는 어른이 뽑힌다.

조부가 계시면 조부가 상객이 되고 조부 대신 아버지나 백부 또는 장형이 되기도 한다.

오늘은 상객 대신 기럭아범(雁夫)이 앞장섰다.

기럭아범은 비단보에 싼 기러기나무조각을 품에 안았다.

기러기는 일생동안 단 하나의 짝을 만나 평생을 함께 산다고 한다.

짝을 잃어도 평생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낸다.

오늘 처음으로 부부가 된 두 사람은 기러기처럼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아끼라는 뜻이다.

 

혼례날에는 모름지기 청사초롱이 있어서 제격. 기럭아범 뒤로 두 명의 어린아이(小童)가 청사초롱을 들고 길을 밝힌다.

앞에서 환한 꽃등을 밝혀주었으니 이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다.

수행인에 둘러싸인 신랑이 마치 암행어사 출두할 때처럼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벼슬을 해 본적이 없는 남자라도 혼인식 날만큼은 예외다.

일생에 단 한번 정당하게 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고 관대를 맬 수 있다.

어디 신랑뿐이랴.

신부도 공주나 옹주의 대례복을 입고 혼례를 치른다.

 

남녀가 배필을 만나 부부가 된다는 것은 신분귀천과 상관없이 경사스러운 일이다.

일산(日傘)을 쓴 신랑은 흰 말을 타고 붉은 비단부채(遮扇)로 얼굴을 가렸다.

귀신이나 부정한 기운을 피하기 위한 주술적인 관례다.

신랑 뒤로는 후행이 뒤따른다.

후행은 신랑과 동년배이거나 손위가 되는 남자 두서너 명으로 정한다.

그러나 혼례풍속도 시대에 따라 간소화되거나 변형된다.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장가가고는 그 시대의 혼인풍속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러모로 변형된 혼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준근은 호가 기산(箕山)으로 19세기 말에 활동한 풍속작가다.

그의 생몰년대는 물론 사승관계에 대해서도 밝혀진 바가 없다.

그는 김홍도나 신윤복처럼 화단에서 이름을 얻은 유명화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다르다.

그의 풍속화 천여 점이 미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 영국, 네덜란드, 일본 등 외국 박물관과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와 캐나다 그리고 러시아의 박물관에서도 그의 작품을 찾아 볼 수 있다.

김준근의 작품이 여러 나라에 소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개항지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의 압력에 의해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하고 부산, 원산, 인천 등을 차례로 개방했다.

이 불평등조약은 열강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만큼

조차지를 설정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은둔의 나라에 살던 조선 사람들은 개항지를 통해 외국의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언어들. 낯선 언어가 전해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조선 사람들은 개항지에서 은둔의 삶을 벗어나 비로소 국제인이 되었다.

조선 사람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다가가려하듯 이방인들 또한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김준근의 풍속화는 아주 효과적인 시각자료였다.

이방인들은 조선의 풍속을 이해하기 위해 김준근의 풍속화를 찾았다.

귀국할 때는 조선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그림을 샀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여행 가서 기념엽서를 사듯 그들은 김준근의 그림을 샀다.

김준근은 부산과 원산에 살면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려 팔았다.

1886년 부산 초량에 살 때는 고종의 초청으로 내한한 미국의 슈펠트(Shufeldt, R. W.)제독의 딸에게 풍속화를 그려주었다.

1892년에는 원산에서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Gale, J. S.)이 한역한 천로역정의 삽화를 맡아서 그렸다.

그의 풍속화는 네덜란드 공사관의 서기관인 라인(Rhein, J.)이 수집했고,

독일의 마이어(Meyer) 상사(商社)의 세창양행(世昌洋行)이 구입했다.

 

독일 출신의 외교관으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을 한 묄렌도르프(Molendorf, P. G. von)도 그의 그림들을 수집했다.

장가가고도 그런 작품 중의 하나다.

이 작품은 영국 해군 대위 캐번디쉬(Cavendish)의 책 조선과 신성한 백두산에 실려 있다.

그는 1891년에 조선을 방문하고 돌아갔는데 그가 쓴 책에는 김준근의 풍속화 26점이 실려 있다.

김준근의 풍속화를 수집한 외국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이방인의 작품을 박물관과 미술관에 기증했다.

김준근의 그림이 김홍도나 신윤복보다 해외에 더 많이 알려진 이유다.

 

김준근의 그림에는 김홍도의 그림에서와 같은 스토리가 없다.

말은 하지 않되 눈빛과 얼굴 표정만으로 교환되는 사람들 사이의 교감이 빠져 있다.

그의 그림은 마치 백과사전의 참고 도판이나 신문의 삽화 같다.

그는 그림을 통해 예술성을 드러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배경 없이 특정한 행사 장면을 그린 그의 작화(作畵) 태도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고 소개하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조선의 풍속을 모르는 낯선 이방인들에게 이국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게 그려주면 충분해서 나온 결과다.

그래서 김준근의 작품은 소재는 같으나 구도만 바꾼 비슷비슷한 그림들이 많다.

그의 그림을 구입한 사람들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그림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조선에 와서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추억이었을 테니까.

이런 그림을 구입하는 것조차도 즐거운 기억이 될 테니까.

 

혜초는 어떠했을까.

그는 4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모르긴 해도 긴 여행을 통해

나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그곳에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었구나하는 확인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인연에 따라 여러 가지 중생의 모습을 하고 살아간다.

탐내는 마음과 화내는 마음과 어리석음 때문에 잠시 잠깐 몸이 병 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불화도 겪지만 우리 안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무량공덕이 들어 있다.

조금도 차이가 없는 똑같은 무량공덕이다.

 

천지우주가 부처님 몸이요 부처님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와 나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

하물며 피부색이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르다 해서 그들과 내가 다르겠는가.

이런 확신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잘 느끼지 못한다.

전혀 다른 환경,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김준근의 그림을 산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 또한 자신의 삶터로 돌아가 일상이라는 매너리즘에 빠질 때면

조선이라는 낯선 땅에서 사 온 그림을 보며 삶을 새롭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 용도의 그림이라면 굳이 예술성이 부족해도 상관없었으리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떠난다.

고생할 줄 알면서도 떠난다.

기왕 고생해서 가는 여행이라면 진한 감동을 받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다르면서도 똑같은 사람살이를 보면서

부처가 곧 중생이고 우주 만유가 바로 한 덩어리의 광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이 글은 법보신문 1306(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8359)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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