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일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해뜨면 밖에 나가 해가 질때까지 일을 한다.
도천스님의 제자 정안스님 역시 스승의 수행을 본받아 묵언과 일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우리나라 12승지(勝地) 중 하나로 꼽히는 충남 금산 대둔산에 소재하는 태고사(太古寺)
대둔산 낙조대 북동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태고사를 가려면
구비 구비 돌고 도는 첩첩산중을 지나야 한다.
7일 구례 화엄사 조실 도천(道川)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태고사를 찾는 날,
전국의 가뭄을 해갈하는 봄비가 촉촉이 내리면서 대둔산은 이내 짙은 안개에 쌓였다.
얼마나 갔을까.
청령골의 끝자락에서 우측으로 ‘등산객은 절대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표지판과 함께
태고사에 접어드는 가파른 길이 나온다.
잠시 후. 태고사의 일주문 격인, 자연석 바위틈으로 한사람이 간신히 통과 할 수 있는 석문이 우뚝 앞을 가로막는다.
이 석문은 ‘기도하고 공부할 사람 아니면 절에 들어오지 말라’는 도천 큰스님의 경책이 그대로 전해지는 문이다.
108계단을 오르니 모습을 드러낸 태고사는 고요했다.
도천스님 처소는 ㄷ자형 법당 옆에 있었다.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여러번 스님을 불러 보았지만 인기척이 없다.
경내를 두어시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한 스님이 걸어오신다.
도천스님 이었다.
합장 반배를 하고 고개를 드니 저만치 가시던 스님이 한번 돌아보신다.
꽉다문 입, 긴 눈썹, 맑은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형형한 눈빛이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스님은 공양주 보살이 건네주는 물 한 그릇을 받아들고 이내 방안으로 들어가셨다.
다음날 새벽 3시. 아침예불을 알리는 도량석 소리와 함께 스님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예불 후 간단한 청소와 이른 아침공양을 마치고 나오니 경내에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어버이날을 맞아 청년불자들이 카네이션을
사중의 스님들에게 꽂아 드리려고 하는데 도천스님이 도통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스님은 경내 어느 곳에도 안계셨다.
6시경. 어제의 거센 비바람 때문에 일을 못하고 산에서 내려갔던 인부들이 올라오자 그 뒤를 따랐다.
절벽 낭떠러지 아래로 놓여 있는 사다리를 타고, 다시 밧줄을 이용해 힘들게 계곡 아래로 내려가니
큰바위 옆에 도천스님이 서 계셨다.
스님께 다가가 아침 문안을 여쭈니 빙그레 웃으시며
“뭐 하러 여기까지 내려왔어. 어디서 왔는가? 아침밥은 먹었고?”라고 자상하게 물으신다.
태고사 불사현장도 보고 스님도 친견하고 싶어서 이렇게 내려왔다고 답하자
스님은 다시 울퉁불퉁한 바위들 틈에 흙을 넣어 다지는 작업을 계속 하시면서
“모든 일은 기초가 튼튼해야 돼. 기초는 잘보이지 않거든.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부실하게 하면 금방 무너져 버리지.
그래서 기초가 중요한 거야. 사람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지혜의 성을 쌓는 기도정진을 하라는 거야”라고 말씀하신다.
목재로 바위틈에 흙을 넣어 다지는 작업은 바로 종각을 짓는 불사의 기초작업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50여년간 태고사에 주석해 온 도천스님은 6·25전쟁 직후 부처님께 마지 올릴 것이 없어
생각한 것이 도량주변에 잣나무를 심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일이 50년이라는 세월동안 계속되고 있다.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스님은 “수행도량 일으키는데 뭐가 힘들어. 하지만 불사를 억지로 하지는 않아.
무리하지도 않고. 되어가는 대로 조금씩 해 왔어.
이곳 태고사는 우리나라 12승지 중 한곳이기도 하지만 많은 선조사 스님들이 거쳐간 수행 성지야.
이 성지에서 보다 많은 불자들이 공부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여 하루빨리 번뇌의 굴레를 벗어나해” 라고 설명해 주신다.
“왜 평생동안 일만 하시느냐”고 여쭙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을 앞세우지 않고 행(行)을 우선으로 해 온 스님의 향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천스님에게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쓸데없는 것이다.
기도하고 공부하는 데 말이 필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것이 수행이다.
그래서 스님에게는 일하는 것이 수행과 다르지 않다.
잠시 후 스님은 나직히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달려 있어. 그러니 항상 마음자리부터 살펴야 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고 눈이나 귀가 보고 듣는 것은 아니야.
내 마음 가운데 주인이 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열심히 일념으로 기도 정진하면 마음의 지혜는 저절로 생겨나.
한마음으로 철저하게 신심 있고 원력을 세우면 부처님이 다 도와주시거든.
무슨 고통이 따르더라고 바른 생각, 바른 일로 밀고 가면 반드시 그 끝이 있어.
지혜로 바른 일 하게 되면 나도 살고 모든 중생도 다 좋게 돼”라고 하셨다.
스님은 좀체 말이 없으시지만
법문을 청하는 불자들에게 공부만은 힘주어 말씀하신다.
너나 할 것 없이 한마음으로 열심히 정진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쌀, 물, 나무로 밥을 짓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모래로 밥을 지으려한다고 부연 설명하신다.
올해 세수 91세인 도천스님은 일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신다.
해가 뜨면 밖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절을 짓고, 나무를 심고, 도량 주변을 정리한다.
90 평생을 일관되게 살아왔다.
스님은 처음 일을 시작하면 어떤 장애와 경계가 생겨도 그 일이 끝나야 일을 놓는다.
스님에게는 일하는 것 자체가 선이요, 수행이다.
스님은 잠시라도 안일과 편안함을 용납치 않는다.
그게 바로 게으름의 시작이라고 생각 하시는 것 같다.
힘이 드니까 수행이 되고, 수행이 되니까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스님의 수행법이다.
스님은 여간해서 밖으로 출타하는 일도 없지만 혹 출타를 하더라도
도량 밖으로 나가면 택시를 타지 않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공양하신다.
돈을 쓰고 안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삼보정재이기에
개인적으로 함부로 쓸수 없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스님은 평소 부처님 같이는 못하더라도 천만분의 일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같이 나누기 위해서는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삿된 것이 많은 세상일수록 정법을 지키고 검약하려는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과 수행을 함께하는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정신이 살아 있는
‘수월가풍’. 태고사에 사는 사람이나 찾아오는 사람은
잠자는 시간을 빼고 누구나 기도정진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둘 중 한 가지는 무조건 해야 한다.
누구든 예외는 없다.
스님은 1929년 금강산 마하연에서 ‘평생 수행하며 살 것’을 발원하며 출가 했다.
은사는 평생 묵언수행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며 법명까지 묵언인 ‘신묵언스님’.
묵언스님은 도천스님이 찾아가 제자되기를 청하자 손가락을 한번 움직여 허락한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후 16년간 스님은 잣나무잎을 따먹으며 은사인 묵언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묵언스님은 2층 정자에서, 스님은 1층에서 생활하며
새벽3시에 일어나 죽비로 예불한 뒤 온종일 은사스님과 일하고 수행했다.
그 묵언스님의 은사, 즉 도천스님의 할아버지가 바로 수월스님이다.
수월스님이 방아찧으면서 한발을 들어서 방아에 올려놓고 조시는데
방아공이가 위에서 떨어지질 않고 그대로 허공에 있자
방앗간 주인이 놀라 도인임을 새삼 알았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수월스님이 도인으로 소문나자 주석하고 계시던 북간도까지 찾아온 스님과 신도들이 매일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항상 하던대로 밖에 나가 묵묵히 일만 하셨다고 한다.
평생 일하고 기도했던 수월스님은 입적하자 마자 7일7야 방광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백장청규 가풍을 철저히 지킨
수월·묵언 스님 가풍을 그대로 전수받은 도천스님은
한마음으로 일에 전념해 태고사에는
어느 한곳 스님의 땀과 손길이 거치지 않은곳이 없다.
“요즘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편하게 살려고만 해.
그런데 호강하고 싶은 이런 마음들이 탐심 진심 치심으로 작용해 나타나고
결국에는 수행과는 전혀 먼 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을 몰라.”
스님의 경책은 그저 한가지에 집중해서 땀을 흘려 열심히 일하면
탐진치 삼독이 눈녹듯 사라지고 온갖 번뇌를 여의게 되는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는 법을 설명하신 것이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상(相)내는 마음도 저절로 사라져 수행의 첫걸음이 되는,
마음을 겸손하게 내려놓는 자세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스님은 흙 속에 묻힌 돌멩이를 골라내시며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다음과 같이 일러주신다.
“인간은 누구나 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 것(死)을 벗어날 수 없어. 그러고 보면 인생은 너무 짧아.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물질적으로 많고 적음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리고 죽으면 벗어놓고 갈 육신을 왜 그리 아껴.
부자와 가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진짜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물질이 아닌 마음뿐이야.
그러니 남의 물건 탐낼 것도 없고, 부자는 자신이 잠깐 맡고 있는 물건들을 없는 사람들에게 줘야 해”
중생사는 너나 할 것 없이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한다며
모든 것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스님은
중생들은 자신들이 지은 업(業)에 따라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수레바퀴처럼 반복하지만
이 이치를 몰라 금생에서 별것도 아닌 일에 집착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3천년에 한번 올라오는 거북이가 바다에 떠 있는 나뭇가지 잡기보다 힘들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짧은 인생 헛되이 보내지 말고
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자리 찾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불자들에게 들려주는 가르침이다.
스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 법을 많이 알려 한사람이라도 빨리 깨우치게 해야 한다”며
“불자들은 한시라도 놀지 말고 기도하고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여 남과 후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당부 또 당부하셨다.
스님의 이런 생각은 태고사에 그대로 화현되고 있다.
앞으로 많은 도인들을 배출할 도량이 완성되고 있고, 제자들도 열심히 기도정진 중이다.
태고사로 들어온 68년 10월 보름에 입재한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33년 동안 기도만 하고 있는 정안스님(59세).
스님은 지난해 1만일 기도를 회향하고
곧바로 또다시 일체 중생 구제, 세세생생 영가천도, 보현행 실천을 발원하며
1천일기도 입재에 들어가 내년 2 월 회향한다.
정안스님은
“어렵더라도 계속 기도하라며 길을 제시하여 부처님 가피를 알 게 해준 은사스님을 존경한다.”며
“스님의 뜻을 이어 중생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정안 스님은 또
“은사스님이 죽자사자 열심히 일하고 계행을 철저히 지키시니 아랫사람들도 저절로 따라가게 된다”며
“몇십년간 이런 생활이 반복되니 뭔지 모를 힘이 태고사에 뭉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산을 내려오며 계곡을 울리며 들려오는 곡괭이 소리가
‘항상 기도하고 마음공부 열심히 하라’는 스님의 말씀으로 다가왔다.
석문 앞에서 아쉬운 마 음으로 뒤돌아보니 관음봉 아래 자리 잡은 태고사를 중심으로
관음대 지장대 보현대 오백나한대가 잣나무숲 사이로 우뚝 우뚝 솟아 있다.
그 위로 넓게 펼쳐진 맑게 갠 하늘은 언제 새찬 비바람을 뿌렸냐는 듯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도천스님은?
91세 불구 365일 울력
1910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나신 도천스님은 19세에 “도를 이루겠다”며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월스님의 제자인 신묵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년간 금강산 마하연 신계사 묘향산 유점사 법왕사 등에서 수행해 온 스님은
전쟁으로 금강산이 북한의 수중에 들어가자 남한으로 내려왔다.
범어사와 내원암 칠불암 해인사선방을 거쳐
금강산과 산세가 비슷한 대둔사 태고사에 방부들이고 공양주 소임을 보았다.
태고사에 빨치산이 들어오자 묵언을 하고
7일 단식을 하다 마지막으로 태고사에서 나왔다.
스님은 ‘난리통에 죽을 뻔했는데 다시 살게 된 것은 순전히 부처님 덕분이고
그 은혜를 갚는 일이 제대로 도량을 정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6·25전 쟁으로 불에 타 아무것도 없는 태고사로 62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태고사 터에 움막을 하나 짓고 나물죽을 끓여 먹으며
40년간 두문 불출 지금까지 불사를 계속 해왔다.
스님은 묵언을 지키고 계행이 청정하며,
철두철미한 보살행, 백장청규에 따라 오로지 일만 할 뿐
좀처럼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수월가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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