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백양산 선암사에 선승들이 찾아왔다.
경남 통영 용화사 도솔암 선방의 선객 들 이었다.
경허 선사의 법제자로 천진도인인 혜월 선사를 조실로 모시러 온 것이다.
그런데 혜월은 그 조실청장(조실 요청서)를 한 젊은 수좌 앞에 놓고는 3배를 올리라고 했다.
도솔암 선승들이 고개를 들어보니 새파란 젊은 중이 아닌가.
그가 불과 27살에 선을 상징하는 조실로 추대돼 ‘소년 조실’로 불렸던 철우 선사(1895~1979)였다.
경북 구미역에서 금오산 쪽으로 내려가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금강사다.
역에서 10분 거리다.
철우가 말년 20여년을 지내다 열반한 곳이다.
그를 시봉한 금강사 주지 정우 스님(59)이 맞는다.
스승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에 무신경인 그가 수차례 간청 끝에 입을 뗐다.
철우는 경남 밀양에서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7살에 아버지를 잃고 13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 마음 둘 곳이 없던 어린 철우는
그 해 밀양 표충사로 출가했다.
‘도를 통하려면 참선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철우는 불과 15살에 참선 길에 나섰다.
해인사 선방에서 한 철을 보내고 팔공산 현풍 유가사 도성암에 있을 때
함경도에서 참선하러 온 한 수좌의 입방이 ‘식량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보고
자기 한 입이라도 덜겠다며 솔잎가루 생식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10년간 생식과 함께 묵언(말을 하지 않음)을 하니 그는 묵언수좌 또는 생식수좌로 불렸다.
태백산 각화사 동암으로 자리를 옮긴 철우는
삐죽삐죽한 철사를 얽은 모자를 만들어 쓰고 이를 줄로 시렁과 연결했다.
잠을 쫓기 위해 졸면 이마가 철사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는 이런 고행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다 홀연히 안목이 트이니 불과 18살이었다.
선방을 다니는 도중 그는 동굴에서 연명하며 정진하기도 했다.
어느 해 한겨울 금오산을 지나던 철우는 마애석불 옆 용샘굴에서 1주일 동안 머물렀다.
밖에 눈이 하얗게 쌓인 날 그가 추위를 잊은 채 선정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등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그의 등에 기대 앉은 호랑이의 꼬리가 무릎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인기척을 하니 호랑이는 살짝 일어서 자리를 떴다고 한다.
호랑이도 알아본 도인을 일제는 알아보지 못했다.
철우가 경남 양산 미타암에 머물 때 부산·경남의 독립투사들이
3·1만세운동 이후 독립궐기문을 지어와 학식이 뛰어난 철우에게 수정을 부탁했다.
이로 인해 독립지사들이 굴비처럼 엮여 일본경찰에 잡혀갔고
마침내 궐기문 최후 작성자가 ‘미타암 벙어리 스님’이라는 게 드러나고 말았다.
철우는 그 일로 온갖 고문을 당했다.
거꾸로 묶여져 코와 입에 고추가룻물이 부어졌고 손톱과 발톱엔 못이 박혔다.
그러나 철우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묵언 중이었기 때문이다.
철우의 엄지발톱과 엄지손톱을 그 뒤 못 박힌 상처 때문에 늘 두개로 갈라져 자랐다고 한다.
몸을 돌보지 않고 다시 수행 길에 오른 철우는
묘향산 금선대에서 홀로 솔잎으로 연명하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억겁의 꿈에서 깨어났다.
당시 국내 최대사찰인 묘향산 보현사엔
경허의 맏제자로 평생 머슴처럼 숨어 일하며 헌신하다 간 수월이 조실로 있었다.
철우의 견성을 한눈에 알아본 수월은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 납자를 제접하라”고 명했다.
철우가 일주문을 나설 때도 수월은 일주문 옆 감자밭에서 호미로 밭을 매고 있었다.
드디어 묵언을 끝내고 포효를 시작한 철우가 “남쪽에서 어떻게 중생을 교화할까요?” 하고 물으니
수월은 “호미를 들고 두 팔을 벌린 채 휙 돌고 춤을 추며 ‘여시여시’(如是如是·이렇게 이렇게)하라”고 했다.
그러니 철우가 밭으로 들어가 수월의 호미를 건네 받아 춤을 추며 ‘여시여시’하겠다”고 화답했다.
그러자 수월은 “(깨달음을)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며 철우를 보냈다.
철우가 남하해 경허의 두 번째 제자인 혜월을 찾아가자
혜월은 단박에 그의 견성을 인가하고 법제자로 삼았다.
철우는 이 때부터 통영 용화사 도솔암과 대구 동화사 금당, 파계사 성전암, 금강산 마하연,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 등에서 ‘소년조실’로 사자후를 토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스승 수월과 혜월처럼 직접 호미를 들고 밭을 매고 손수 자신의 빨래를 하며 살았다.
말년엔 더욱 조용한 삶이었다.
그러니 뉘라서 그의 금강체를 바로 볼 수 있었을까.
철우가 열반에 들어 다비를 위해 그의 법구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서자
마른 하늘에 오색 광명이 떴고 영결식 때와 다비식장에서 법구에 불을 붙일 때
다시 이처럼 희유한 현상이 반복됐다.
한 때는 소년조실이었고 한 때는 노승이었던 철우는 이제 어디로 갔는가.
그의 오색광명을 기려 금강사에 제자들이 세운 ‘적조(寂照)탑’을 뒤로 하고 돌아서니
철우가 열반 전 한 불자의 죽음에 즈음해 읊은 만사가 다시 노소와 생사의 꿈을 깨운다.
“색신을 바꾸어서 법신으로 돌아가니/한 줄기 신묘한 광명이 오래오래 빛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