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혼해선사

敎當 2014. 12. 9. 15:56

 

6·25 전쟁 중이었다.

대찰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져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때였다.

경남 함양읍의 조그만 사찰엔 일흔이 넘은 노승이 피난 와 있었다.

이 절엔 전라도에서 피난온 20대 여인이 공양주(부엌살림을 맡은 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전라도 갑부의 딸로 해방 전 서울에서 여고를 나온 미모의 여인이었다.

좌익엘리트로 동경제대를 나와 소학교 교감을 하던 그의 남편이

전쟁 중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히자

시어머니와 여섯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숨어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여인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러자 노승은 법회 때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아이임을 이실직고했다.

 

그 노승이 바로 금강산 장안사의 대강백(강사)이자

해방 전 해인사 조실을 지내고 훗날 우리나라 선의 본가가 된 해인총림의 초석을 놓은 혼해 선사였다.

청정 독신승이 드물던 시대에 청정하게 칠십 평생을 살아온 고승이 남편 있는 여자에게 아이를 배게 했으니

망령 난 중으로 손가락질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혼해는

16살에 삼척 천은사로 출가해 금강산에서 경을 본 뒤

경북 문경 대승사, 선산 도리사, 김천 직지사, 양산 통도사 내원암 등의 선방에서 정진한 선객이었다.

혼해는 젊은 시절부터 김천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출세간을 넘나들었다.

시장통의 번잡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공부였다.

그 때 혼해는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도 화두심을 놓지 않아

김천 시내를 관통하는 강물을 한 겨울에 알몸으로 얼음을 깨고 오고가도

춥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노승은 세속에 살면서도 해인사 조실 시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규율이 엄한 대찰에 머물다 아무도 간섭하는 이 없는 속가에 나오면 곡차()를 들고

곰방대에 담배를 무는게 예삿일이었지만 혼해에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21녀의 자식을 두고도 그는 새벽부터 예불을 하고 경을 읽고 좌선을 했다.

함양에서 그를 시봉한 김명호 거사(86)와 해인사 한주 송월 스님(80) 등이 그를 지켜본 산증인들이다 

 

혼해는 전쟁의 와중에 기구한 운명이 된 여인이

사형 당하거나 평생 옥살이로 삶을 마감할 옛남편의 고난에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고는

30가마를 들여 그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혼해의 노력으로 여인의 남편이 마침내 석방되자 혼해는 그 여인을 옛남편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가 나 사상범 일제 재검거령이 내려져 남편은 다시 감옥에 끌려들어갔고

여인은 다시 함양에 왔다.

 

혼해의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지를 아는 대찰에선 그를 다시 스승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상주 남장사에 머물 때 윗반에선 태백산 각화사 서암의 전 선원장 고우 스님이

아랫반에선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장 대원 스님과 구미 금강사 주지 정우 스님 등이 배웠다.

 

당대의 대강백이던 고봉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고우는 어느 날 혼해를 보고

짧다란 키에도 뭔지 모르게 당당하던 모습에 이끌려 야반도주해 남장사로 갔다.

고우가 방청소와 빨래까지 수발을 들며 가까이 지켜본 혼해는 오랜 세속 생활을 한 뒤였지만

절집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승려들보다 더 어김 없는 승려였다.

특히 그의 강설은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다른 강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금강경>을 배울 때 고우가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사위성에서 걸식을 하시고,

정사로 돌아와 공양을 마친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마련하고 앉았다고 첫 대목을 읽으면,

이 행동만으로 부처님이 모든 법을 설해 마쳤다고 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혼해는 끊임 없는 물음으로 학인의 의문을 내면으로 돌렸다.

강사보다는 선사적 면모였다.

대원 스님도 그 시절 좌선을 하던 중 급작스런 혼해의 물음에 하늘땅이 무너지는체험을 했음을 밝혔다.

 

인간이란 좀 더 나은 위치에 서면 우월감에 젖어 뽐내기 마련이고,

약점이 있으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속가에 처자식까지 둬 손가락질 받는 처지였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노구의 몸이었지만 그는 당당하기만 했다 

고우는 그런데도 그가 처자식을 뒀다는 사실이 뭔가 꺼림칙해 그 분을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면서

지금 같았으면 그런 분별심은 놓고 그 분을 모시고 공부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흙 속의 연꽃을 어디에서 찾았던가.

혼해의 강설이 맴돌던 상주 남장사 일주문 밖 노음산을 지나 속세인 상주 시내로 접어드나

노음산의 그 하늘 그대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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