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정영 선사

敎當 2014. 6. 10. 11:17

 

세상에 <절대 안돼> 란 없다

손가락질 받더라도 수행정신 잃지말라 강조

입적 전날 링거뽑고 돌아와 옷·물건 나눠주고 공수거

 

···바람으로 흩어진 <무소유은자>

스님, 출가자는 절대로 술 마시면 안 됩니까?”

“..........................

스님, 출가자는 절대 연애도 해서는 안 됩니까?”

18살에 출가한 효림 스님(실천불교승가회 의장)이 정영 선사(1925~95)에게 물었다.

이제 막 세상사에 눈을 떴지만 자신의 몸엔 이미 승복이 걸쳐져 있었다.

마침내 가슴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을

은사나 다름 없는 사형(같은 은사에게 출가한 선배)에게 물은 것이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영이 말했다.

세상에 <절대>란 없다.”

세속 친구들처럼 술도 마시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던 효림이 그토록 원하는 답이었지만

청정하기 그지 없이 살아온 사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엔 깡패가 마시는 술이 있고,

학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선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중이 마시는 술이 있다.

중이 깡패처럼 술을 마셔서야 되겠느냐.”  

어떻게 마시는 것이 중답게 마시는 것입니까?”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중이 술을 마시고, 중이 연애하는 방법이다.

아무리 칭찬 받을 행동만 해도 그것이 남을 의식해서

박수받기 위해 한 것이라면 수행에 해가 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행위라도 수행을 돕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회주로 있는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서 효림은

정영 스님의 답은 조사 어록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늘 이렇게 살아 있는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정영은 세상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선사다

출가에서 열반까지 35년 가운데 20여년을

경북 문경 김용사 금선대와 상주 남장사 중궁암 등 깊은 산에서 홀로 정진했다.

선방에서 살 때도 조용하기 그지 없는 그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평안도에서 태어나 월남한 뒤 대학을 다니던 그는 한국전쟁으로

북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남쪽에 혼자 남게 됐다.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하며 고학으로 야간대학을 다녔다.

전공은 수학이었다.

대학 졸업 후 상공부 특채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재직했으나

자유당 정권 시절 공무원들의 부패상에 절망해 사표를 내고 중·고교의 교사가 됐다.

그러다 용성 선사의 제자로 서울 대각사에서 <(깨달음) 운동>을 펼치던

소천 선사의 설법을 듣고 그를 은사로 출가했다.

그에겐 오직 수행 뿐이었다.

신자도 두지 않았다.

금선대에서 지낼 때 산에서 길을 잃어 죽을 뻔하다가 목숨을 건진 한 보살이 유일한 신자였다고 한다.

 

말 없이 조용한 그의 미소를 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깊은 평화를 느꼈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그는 어떤 직위도 갖지 않았다.

한 때 태백산 각화사 주지를 맡았으나

수행 잘하는 제자를 그르칠까 우려한 은사가 당장 그만두라고 하자

그날로 주지직을 던지고 숨어버렸다 

아집에서 해탈하는 것이 불교지만 승려는 승복에 갇히고,

선승은 <화두선>에 갇히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정영은 토굴에서 혼자 살다보니 내가 중인 것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에겐 벽이 없었다.

 

참선을 하던 효림이 사회활동에 나선 것을 마뜩해하지 않았지만

진실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뜨는 법이라며 눈 뜬 시민사회운동을 하도록 경책했다 

젊은 시절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수행만 해 그의 폐엔 동전만한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었고

몸은 대꼬챙이처럼 바짝 말랐었다.

경주 불국사에서 말년을 보내던 정영은 병원에 입원했으나

아무도 몰래 주사바늘을 뽑아버리고 절에 돌아왔다.

스님들이 왜 벌써 오셨느냐고 묻자 이제 다 나았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정영은 입적했다.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이었다.

그의 방엔 아무런 물건도 없었다.

몇 개의 옷과 물건까지도 미리 다른 수행자들에게 모두 나눠준 뒤였다.

책상엔 절에서 준 차비 등을 모아 5백만 원이 든 통장을 화장비로 쓰라는 메모와 함께 남겨두었다.

빈 몽뚱이로 인해 사중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그다운 처사였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어온데다 전국의 도로가 체증을 빚는 설날 전날에 떠나

장례식에 누구도 오기 어려웠다.

그의 제사도 절 집안이 가장 바쁜 설 전날이기에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효림이 방에서 혼자 지낼 뿐이다.

그의 몸은 인근 화장터에서 태워져 산에 뿌려졌다.

그의 돈은 학승들이 보는 책을 사는데 보시됐다.

그는 상좌(제자) 한 명 두지 않았다.

탑도 세워지지 않았다.

그의 뜻에 따라 그를 기리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효림이 소중히 간직했던 사진조차 1998년 수해 때 보광사 안 설래당과 함께 쓸려가 사라져 버렸다 

 

최근 스님들이 골프연습장을 짓고

고급차를 굴리는 등 사치스런 생활로 빈축을 사고 있는 불국사는

일체 무소유의 은자가 빈몽뚱이마저 벗어버린 곳이기도 하다.

불국사 경내엔 노송이 많다.

산소와 그늘과 솔방울과 솔향까지 아낌 없이 주고 빈몸으로 서서도 늘 푸른 것은 어인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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